출범 3년차를 맞은 문재인 정부는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먼저 북한발 딜레마다. 남북한 사이의 접촉이 끊겼다는 점뿐 아니라, 평양이 내보내는 메시지의 내용 또한 심상치 않다. 4월12일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조선 당국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4·27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재개하고, 철도 연결 사업도 과감히 추진하라는 주문인 셈이다. 미국에 끌려 다니지 말고 이른바 ‘민족 이익의 관점에서’ 당사자로서 대북 관계에 임하라는 압박이다.

미국의 뜻도 단호하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으로 ‘같은 페이지’에 있기 때문에 ‘동맹 이익’의 관점에서 미국과 “물샐 틈 없는(air tight)” 대북 공조를 해나가야 한다는 주문이다. 미국과 더불어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완료할 때까지 한국은 ‘최대 압박과 제재’ 전략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 측은 부분적 제재 완화 같은 인센티브 없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빅딜의 타당성을 설득해달라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형국이다.

북한의 ‘민족 이익’과 미국의 ‘동맹 이익’ 요구 사이에 낀 샌드위치. 이것이 2019년 초여름 한국이 처한 딜레마의 본질이다. 국내 여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보수 진영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 지도자의 ‘대변인’ 역할이나 하면서 한·미 동맹을 해치고 있다고 정치 공세를 편다.

 

ⓒ연합뉴스정부는 북한의 취약계층을 돕는 국제기구의 사업에 800만 달러(94억여원)를 지원하기 위한 집행 절차를 5일 마무리 지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인도적 대북지원사업이 첫발을 떼게 됐다.

사진은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열린 기초지방정부와의 남북교류협력 사업 간담회에 참석한 김연철 통일부 장관. 2019.6.5

 

 

 

진보 진영의 비판도 커지고 있다. 제재의 틀 안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은 물론 남북 경협과 사회문화 교류를 적극 전개해나가겠다고 공언하더니 그동안 한 게 무엇이냐는 볼멘소리가 거세다.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내 여론의 양극화 현상 또한 문재인 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처지는 흡사 메시나 해협에서 스킬라라는 암벽 괴물과 카리브디스라는 소용돌이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연상케 한다. 어쩌면 오디세이보다 더 어려운 국면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오디세이는 지금의 한국처럼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라는 자중지란을 겪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삼중의 딜레마(trilemma)를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민족 이익과 동맹 이익을 넘어서 우리 국민을 위한 ‘국가 이익’에 투철한 정부의 자세가 필요하다. 북의 핵무장 고착화를 막고, 미국의 군사행동을 방지하는 동시에,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핵무기 없는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만드는 게 우리의 국가 이익이다.

둘째,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 상상력 있는 외교정책을 전개해야 한다. 어려움이 있다면 공론화해서 중지를 모으고 국민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더욱 견고한 위치에서 대미·대북 협상을 전개할 수 있다.

청와대 참모와 장관들, 과감하게 행동해야

셋째, 지나친 신중함은 북측과 미국, 우리 국민 모두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받기 어렵게 만든다.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청와대 참모와 장관들이 모두 ‘굿 캅(good cop)’이 될 수는 없다. 때에 따라 평양이든 워싱턴이든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대북 인도적 지원은 보편적 가치다. 좌고우면할 사안이 아니다. 제재의 틀 안에서 남북 교류협력을 이어가기로 했으면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문제가 있으면 이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결기를 보여야 한다.

북측도 전향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민족 이익 운운하며 일방적으로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남측과 만나서 협의하고 공동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순리다. 두 정상이 온 겨레 앞에서 다짐한 백두산 천지의 결의를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현재 시점에서는 북이 선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것도 풀릴 수 없다. 오히려 김 위원장이 언급한 12월 말이면 모든 상황이 파국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평양은 깨달아야 한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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