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오보는 항상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헛소문조차 몇 명의 인생을 망가뜨릴 만큼 심각할진대 대중에게 사실을 말(言)하고 진실을 논(論)하는 언론이 미필적 고의로든 실수로든 오보를 낸다는 건 사회문제가 되고 나아가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기 때문이야. 우리 현대사에서 터져 나왔던 숱한 오보 가운데 최악의 오보를 들라면 역시 1945년 12월27일 미군정 아래의 ‘남조선’을 강타한 ‘조선 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 보도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구나.

이날 아침 각 신문들은 3상(三相), 즉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과 소련과 영국의 외상(외무장관)이 해방된 조선에 미국·영국·중국·소련이 5년간 공동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했는데 석간인 〈동아일보〉는 이런 기사를 1면에 내걸었다. “외상회의(外相會議)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뒤이어 〈동아일보〉는 미국은 카이로선언 이래 조선은 국민투표를 통해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했지만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팔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고 보도했어. 미국은 빨리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정부를 만들고 독립시켜주려고 하는데, 소련이 이걸 배배 꼬고 앉아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있다는 말이었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오보를 낸 〈동아일보〉.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춘다’는 해방으로부터 넉 달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야 나라를 세워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볼 판인데 난데없는 신탁통치라니. 36년간 남의 나라 종살이를 경험한 수천만 조선 사람들에게 신탁통치라는 단어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고, 얼큰하게 취해서 길을 걷다가 쇠뭉치에 뒤통수를 두들겨 맞는 ‘퍽치기’ 같은 공포였단다. “우리가 왜 또 남의 나라 밑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냐.”

그로부터 며칠 동안 조선은 거의 완벽하게 ‘대동단결’을 이루었다. 박헌영 등 골수 공산주의자들부터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우익 지주들까지 좌와 우의 구분이 없었고, 군정청 고위 관리부터 아직도 은근히 천대받고 있던 시골 백정들에 이르기까지 상과 하를 막론했지. 당장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어. 아마 1945년의 마지막 며칠만큼 조선 사람들이 ‘일치단결’했던 일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드물 것 같구나. “동포여! 8·15 이전과 이후 피차의 과오와 마찰을 청산하고서 우리 정부(이건 당시 미군정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말한다) 밑에 뭉치자. 그리하여 그 지도하에 3000만의 총역량을 발휘하여서 신탁관리제를 배격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자주독립을 완전히 획취하기까지 3000만 전 민족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라도 흘려서 싸우는 항쟁 개시를 선언함(국민총동원위원회 결의문).”

전국의 극장이 문을 닫았어. 극장 지배인들이 〈동아일보〉가 전한 신탁통치 소식을 알리자 관객들은 우리가 영화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고 해. 다음 날은 극장이고 ‘딴스홀’이고 모조리 휴관이었지. 주당들도 우리가 술 먹을 때냐며 팔소매를 걷어붙였고 유흥가 종사자들도 문 닫아걸고 시위에 나섰어. 미군들에게서 월급 받던 군정청 직원들과 경찰들까지도 일손을 놓았다. “우리는 지금 이같이 모여 결의를 했다. 경찰관의 직을 떠나 자주국가로서 완전 독립이 올 때까지는 민중과 더불어 치안대원으로서 결사의 사명을 다하겠다(서울 동대문서장의 발언).” 좌익들도 어쩔 수 없었어. “신탁통치 결정이 사실이라면 결사반대한다.” 심지어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의 전속 요리사까지 출근을 하지 않아 조선의 최고 행정수반이었던 하지 중장이 끼니를 거를 위기에 처했다니 말 다 했지.

좌익, 3상 결정의 진실 밝히며 ‘찬탁’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 기사, 즉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기사는 명백한 오보였어.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맞지만 신탁통치를 주장한 측의 주체가 뒤바뀌어 있었던 거야. 신탁통치를 강하게 주장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고 소련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쪽이었는데 말이다. 한국의 독립이 최초로 언급된 카이로선언 당시만 해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언급했고, 영국은 조선 독립을 의제로 넣는 것조차 반대했단다(〈중앙일보〉 2005년 11월26일). 그 뒤 얄타회담에서도 소련의 스탈린은 20~30년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고 대꾸했단 말이지.

1945년 12월3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전국 집회’ 모습.

모스크바 3상 결정은 조선인들이 오해한 대로 외국이 일본의 뒤를 이어 한반도를 통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어. 다른 조항에 따르면 한국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했고, 임시정부는 신탁통치의 시한과 방안을 4개국 정부와 협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즉 조선에 불리한 결정은 아니었어. 그러나 사람들은 ‘신탁통치’라는 단어 자체에 감정적으로 흥분했고 〈동아일보〉가 터뜨린 오보의 급류에 휩쓸려 ‘반탁 대동단결’로 쏠리고 만 거야.

오보가 위험한 것은 대개 사실을 다투는 게 아니라 감정을 건드려서라고 할 수 있어(〈동아일보〉는 그 이전부터 소련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왔거든). “신탁통치 절대 반대! 결사코 자유를 전취하자! 살아서 노예가 되느니보다 죽어서 조국을 방호하라!”는 우익의 외침은 오보에 근거할망정 명료하고 단순하고 확실했지. 이에 비해 “누가 조선 민족을 일본 제국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주었으며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여온 연합국이 우리에게 압박과 노예화를 기도할 리가 있는가?”라는 좌익의 호소는 냉정한 사실일망정 궁색하고 허약하게 들렸던 거야. 해방 공간에서 꽤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좌익 세력은 3상 결정의 진실을 밝히며 ‘찬탁’으로 돌아섰지만 되레 반민족 세력으로 낙인찍히며 급속도로 세를 상실하고 말았어.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 말대로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흔히 우리는 ‘진실(truth)’과 ‘사실(fact)’ 을 얘기한다. 대개 진실은 열정적이고 가치에 충만하지만 사실은 무미건조하고 심지어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지. 항상 우리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어. 진실은 맥락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고 앉은 자리와 선 위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일단 왜곡되지 않은 사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법이고, 진실은 그런 사실들에 의해 뒷받침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거든.

완전히 사실과 달랐던 〈동아일보〉의 오보는 해방된 해의 세모를 벌겋게 달구었고, 그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선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서인지 모를 춤을 추었지. 그 오보가 없었더라면 우리 역사가 바뀌었을까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 하지만 그 오보가 우리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하여 그로부터 50년 뒤 〈동아일보〉가 이런 말을 했던 것 또한 지나치게 뻔뻔스러운 일이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동아일보〉는 즉각 반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한 좌익 계열의 매국성을 용기 있게 지적했다(〈동아일보〉 1995년 4월1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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