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넘어진다는 건〉의 책장을 한두 장만 넘겨보면 주인공 ‘노엘’이 좀 별난 사람임을 알게 된다. 말은 어눌하고 대화는 쉽지 않다. 생일을 맞은 노엘은 엄마와 함께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는 생일 선물로 기타와 함께 아들이 좋아하는 록밴드의 공연 티켓을 준다. 잠들기 전, 엄마와 노엘은 영원히 함께 있을 거라는 대화를 나눈다.
바로 그날 밤, 엄마는 욕실에서 쓰러지고, 쓰러진 엄마를 발견한 노엘은 어쩔 줄 몰라 하다 우여곡절 끝에 119에 신고하고 병원에 간다. 엄마는 끝내 의식불명에 빠진다. 엄마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노엘은 낯선 이들 손에 이끌려 낯선 도시로 떠나 낯선 사람의 보호를 받게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마을’ 이야기
그림책은 이렇게 슬프게 시작되지만 그리 어두운 톤으로 그려진 것만은 아니다. 노엘이 ‘노이에어케로데’에서 살며 이곳에 적응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노엘의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것은 작가가 허구의 세상을 상상해서 그려낸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녹여 그린 힘으로, 독자는 노엘과 그의 친구들(노엘이 속한 세상)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강박증이 있는 까칠한 청년 발렌틴, 경찰 행세를 하고 다니는 율리 아저씨, 발달장애가 있는 소년 브리기타, 뇌전증을 앓는 성깔 있는 소녀 엘리스 등과 함께 노엘의 좌충우돌 ‘적응기’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책의 배경이 된 노이에어케로데는 독일 베를린에서 서쪽으로 약 190㎞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주인공 노엘처럼 지적장애가 있거나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들, 그들을 돕는 사회복지사와 의료 전문 인력 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통합마을이다.
작가 미카엘 로쓰는 2년 가까이 매주 3~4일 노이에어케로데에서 거주하며 마을의 일상을 관찰하고 주민들을 만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를 대하던 주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먼저 그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집을 공개하고,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털어놓는가 하면 마을에서 겪은 사소한 일상을 나누었다. 그 덕분에, 작가는 우정과 사랑, 유쾌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그들의 일상을 그래픽노블로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은, 일상이 되어버린 노엘의 ‘넘어짐(좌절·역경)’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어찌 보면 우리의 삶에서 ‘넘어진다는 것(우연한 기회에 유도를 배우게 된 노엘이 관장으로부터 들은 말이기도 하지만)’은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피곤하고 늘 넘어짐뿐이어서 막막한 다수의 비장애인에게, 먼 나라 독일의 작은 마을 공동체에서 보내온 이 이야기 하나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해하고 껴안게 만든다. 우리 모두 잘 넘어지는 법을 알게 되기를. 그래서 툭툭 털고 모두 다시 일어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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