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레비는 1902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나 토리노 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파리로 가서 의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화가로 활동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레비는 1922년,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총리가 되자 친구들과 함께 반파시스트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이 때문에 당국에 체포되어 이탈리아 남부 루카니아 지방 갈리아노(현재 지명은 알리아노)에서 2년간(1935~1936) 유배 생활을 한다. 이후 갑작스럽게 유배형이 풀린 그는 나폴리의 한 은둔처에서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북인더갭, 2019)를 집필한다.

이탈리아 지도를 반으로 접으면 중간쯤에 로마가 있다. 로마 위쪽으로 북상하면서 차례대로 피렌체·제노바· 토리노·베네치아가 있고, 로마의 남쪽에 나폴리가 있다. 산업화 지역인 이탈리아 북부는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온 반면, 농업 지역인 나폴리 이하의 남부는 미개와 가난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나폴리 아래에 위치한 에볼리는 남부 지역으로 향하는 관문과 같은 도시로, 지은이는 유배지에서 듣게 된 갈리아노 사람들의 자조적인 격언에서 이 책의 제목을 빌려왔다. “그리스도가 오기 30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든, 신으로부터 온 것이든 그 어떤 메시지도 이 마을은 고집스러운 가난에 도달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이지영

갈리아노에서 레비를 환대한 것은 그 지역 호족들이다. 거개가 지주이면서 지역의 부와 공권력을 모두 차지한 이들은, 북부에서 온 죄수를 자신과 똑같은 계급으로 대접했다. 레비는 죄수이면서 ‘북쪽’에서 온 귀한 인물로 대접받으며 지역의 양대 호족 간 세력 다툼에 휘말린다. 이런 카니발적인 상황은 이 책을 소설처럼 읽히게 한다. 레비가 관찰한 남부 문제의 핵심은 무척 교훈적이다. 첫째, 편을 갈라 싸우는 갈리아노의 호족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중앙(로마) 정치를 이용할 뿐, 이념(파시즘)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풍경은 한국의 지역 정치에서도 자주 보는 것이다. 둘째, 레비는 유배가 끝나고 나서 북부의 좌파 지식인들과 남부 문제를 논의하면서 “국가는 민중과 그들의 삶을 초월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과 전혀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가난은 국가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레비의 생각에는 “국가가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국가와 중간 계급(호족)의 이해가 농민을 가난하게 했으며, 농민들이 가난을 탈출하는 “출구의 이름은 바로 자주성”이다. 그의 발견은 1960년대 말에 생겨난 이탈리아 자율주의 (Autonomism)를 미리 보여준다.

소설이 아니면서 소설만큼 재미난 책으로 히샴 마타르의 〈귀환〉(돌베개, 2018)을 꼽을 수 있다. 2011년 8월, 리비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독재(1969~2011)를 무너뜨렸다. 시인이었다가 군인 장교가 된 지은이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카다피에 의해 유엔 리비아 대표부 행정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표를 내고 반체제 운동에 투신했다. 은행 잔고만 600만 달러가 넘었던 자발라 마타르는 리비아 반체제 세력의 지도자였다. 지은이가 여덟 살 때인 1979년,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망명했다. 그러나 1990년 3월, 아버지는 카이로의 아파트에서 이집트의 비밀경찰에 납치되어 카다피에게 넘겨졌다.

아버지가 납치된 뒤, 런던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가가 된 지은이는 아버지의 행방을 쫓으며,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2004년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은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의 독재를 승인해주었고, 영국 정부는 리비아 반체제 인사들을 트리폴리로 이송하는 것을 도왔다. 서구의 선진국 정부는 왜 제3세계의 독재자들을 비호하는가. 영국 지배층은 리비아 독재정권과 함께 꿀을 나누는 사업이 많았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지은이의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납치될 때, 리비아 국내에 있던 삼촌과 사촌 네 명도 함께 체포되어 트리폴리의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 아부살림 교도소에 21년간 수감되었다. 아버지는 1996년 6월29일, 정치범 1270명을 한 날에 몰살한 아부살림 학살 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을 읽은 독자 가운데 혹시 카다피의 최후를 인터넷 동영상으로 보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동정하지 마시라.

일본의 재일조선인 여성 단체 미리내가 엮은 〈보통이 아닌 날들〉 (사계절, 2019)은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재일조선인과 일본 안의 피차별 부락·아이누·오키나와·베트남·필리핀 출신 등 주변부·소수집단 여성들의 뿌리를 탐색하면서 차별에 대항했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유배 아닌 유배, 디아스포라(Diaspora) 아닌 디아스포라의 광경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책을 출간한 기획자는 책 출간에 앞서, 주변부·소수집단의 가족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이 기획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사진을 매개로 이민, 정착, 세대 간의 연결, 모국 방문 등 가족의 내력을 재구성하고 거기에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된다. 처음에는 재일조선인 여성을 대상으로 기획했던 가족사진 수집과 전시회는 일본 안의 피차별 부락·아이누·오키나와·베트남·필리핀 여성들의 역사와 연대하게 되었다. 주변부·소수집단 여성은 분명 그 사회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세계에서는 늘 배제되고 수탈”당해왔다. 이 문제는 ‘서발턴(하위 계층)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한다. 가족사진을 늘어놓고 이야기의 살을 붙여가는 과정에서 차별의 역사적 근원을 알게 되고, 차별 속에서도 삶을 꿋꿋이 지탱해준 저력을 확인한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차별에 저항하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주변부·소수집단에 대한 처우는 한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준을 나타내주는 지표다. 〈보통이 아닌 날들〉은 일본 사회가 교육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주변부· 소수집단 여성을 인종·민족·젠더라는 잣대 아래 차별하고 혐오해왔다고 말해준다. 한국 사회의 조선족, 다문화 가정, 외국인 노동자,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 역시 일본 사회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이런 사회일수록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긍심과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자기표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이 책의 기획자들이 가족사진이라는 아이디어에 착안한 것은, 연로한 세대들이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에 약했던 이유도 있다. 가족사진을 갖고 가족사를 꾸며보는 곳에는 유익한 점이 많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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