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C 홈페이지 갈무리자기주장이 확고해진 이민 2세대와 한국인다운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1세대 간의 문화충돌을 그린 〈김씨네 편의점〉 포스터.

“아시아계 부모님들, 부탁드릴게요. 몇 사람만이라도 애들 손에 바이올린 대신 카메라를 들려주면 상황이 좀 나아질 거예요.” 2016년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터 오브 제로〉로 에미상 코미디 부문 각본상을 수상한 타이완계 미국인 작가 앨런 양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시아계 이민자 1세대들은 현지에 잘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제 목소리를 크게 내길 주저하고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경제적 안정을 거두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사회 안에서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것에는 실패해 인종차별과 관련된 논의에서조차 곧잘 배제되곤 했다. 그래도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다.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공부는 잘하지만 운전은 못하는 이들’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나, 진짜 아시아인의 삶을 고찰하는 작품들이 미디어에 더 자주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 이전에 ABC 시트콤 〈프레시 오프 더 보트〉(2015~현재. 이하 [FOTB])가 있었다. 유명 셰프 에디 황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시트콤은, 1990년대를 배경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백인이 아닌 사람이 손에 꼽히는 플로리다 올랜도로 이주한 타이완계 이민자 가족의 삶을 그린다. 어린 에디는 마이너리티로서 느끼는 소외감을 힙합과 길거리 농구로 풀지만, 아들이 순종적인 중국계 소년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엄마 제시카는 흑인 문화에 심취한 에디가 못마땅하다. 이웃의 백인들은 “당신은 중국인이니 공산주의자 아닌가요?” 같은 질문을 예사로 던지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취두부를 쓰레기 취급한다. 그러나 제시카는 주눅 들지 않고 상황을 헤쳐 나간다. 전기세를 아낀다고 애들을 데리고 마트에 가서 공짜 에어컨을 쐬고, 자격증도 없이 덜컥 무허가 부동산 중개인으로 활약하면서.

전통을 고수하려는 1세대와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2세대 사이의 문화적 충돌과, 소수자로서 자신을 표현할 방법조차 다른 인종 그룹의 문화를 빌려와야 하는 아시아계 소년의 소외감을 유머를 섞어 표현한 [FOTB]의 성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마거릿 조 주연의 ABC 시트콤 〈올 아메리칸 걸〉(1994~1995)이 한 시즌 만에 종영된 이후, 미국 지상파 네트워크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주연 삼은 시트콤을 방영한 게 20년 만이었으니까. [FOTB]의 성공은 전 세계를 강타한 1990년대 복고 트렌드를 영리하게 활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미국 사회 안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알려온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강인한 엄마 제시카 역의 콘스턴스 우는 중국인들의 문화적 자긍으로 도배가 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통해 할리우드 A급 배우로 거듭났다.

〈김씨네 편의점〉 배우들 스타로 거듭나 

비슷한 시기 방영을 시작한 캐나다 CBC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 (2016~현재) 또한 이민 1세대와 2세대 사이의 문화적 충돌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계 캐나다인 극작가 최인섭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김씨네 편의점〉은 [FOTB]와는 달리 다인종 사회인
현재의 토론토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자연스레 백인 중심 사회에서 아시아계 이민자가 겪는 문화적 차이점은 다소 덜 부각되는 대신, 이미 성인이 되어 자기주장이 확고해진 2세대와 한국인다운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1세대 간의 문화충돌이 더 부각된다. 보수적이고 고집불통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 딸보다 아들을 먼저 챙기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딸의 갈등 같은 이민자 가정 내 갈등과 화해의 양상이 〈김씨네 편의점〉의 핵심이다.

캐나다 전체 인구의 1%가 채 안 되는 한국계 캐나다인 가정을 배경으로 한 〈김씨네 편의점〉이 캐나다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비결이 여기에 있다. 출신 국가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이민자 가정이 김씨네와 비슷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식이 한인 교회에 출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갈등은 유달리 개신교도 비율이 높은 한인들의 특수성이지만, 서구 사회에 온전히 적응한 2세대와 출신 국가에서 살던 방식을 고수하려는 1세대 간의 갈등 양상만은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니까. 아들 정을 연기한 중국계 캐나다인 배우 시무 리우와 딸 재닛을 연기한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안드레아 방은 모두 〈김씨네 편의점〉을 통해 캐나다 현지의 스타로 거듭났는데, 시무 리우는 최근 마블 MCU의 히어로 ‘상치’ 역할에 캐스팅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BBC America 홈페이지 갈무리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샌드라 오(위)는 〈킬링 이브〉의 주인공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이 집단으로서 아시아계가 지닌 특수성에 좀 더 집중하는 작품이었다면, BBC 아메리카의 스릴러 드라마 〈킬링 이브〉 (2018~현재)는 개인으로서 아시아계 서구 시민이 지니는 보편성을 활용한 작품이다. 미지의 여성 청부살인 업자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를 추적하는 영국 정보부 요원 이브 폴라스트리와, 다시 자신을 추적하는 이브의 뒤를 쫓는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의 심리전을 그린 〈킬링 이브〉는 등장하자마자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신선도 지수 100%를 기록하며(현재는 94%) 평단과 팬들의 만장일치 찬사를 받았다. 흥미롭게도 이브 폴라스트리를 연기한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샌드라 오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자신이 이브 역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주연을 맡는 경우가 극히 드물거니와, 이브가 한국계여야 하는 이유도, 한국계라는 암시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작 소설 속 이브는 백인이다.

영화 〈서치〉(2018)가 그랬듯, 〈킬링 이브〉 또한 굳이 아시아계일 필요가 없는 보편적인 주인공 자리에 아시아계 배우를 캐스팅해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서치〉 속 싱글 대디 데이비드(존 조)나 〈킬링 이브〉의 정보부 요원 이브 모두 개인이 지닌 직업적 능력과 성격이 중요한 캐릭터이지, 특정 인종그룹의 특성이 앞서는 캐릭터가 아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굳이 백인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크리에이터 피비 월러-브리지는 인종을 떠나 조금은 엉뚱하지만 솔직하고 영민하며 강인한 이브의 성격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ABC 〈그레이스 아나토미〉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샌드라 오가 캐스팅되기에 이른 것이다. 오랜 세월 괴짜 감초 조연이나 대사 몇 마디 없는 기능적인 인물을 연기하면서 기회를 노려온 아시아계 배우들은, 이제 주류 관객을 향해 자신들의 문화적 체험을 들려줄 뿐 아니라 서구 사회의 보편 시민으로서 대표성까지 획득하는 중이다. 앨런 양의 전망처럼,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기자명 이승한 (작가·TV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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