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이었다. 안해룡 사진가가 편집국을 찾았다. 한 손에 노트북이, 또 다른 손에는 〈타임(TIME)〉이 들려 있었다. 그가 노트북을 켜 사진을 보여주었다. 추모비, 추도비, 순직비, 위령비… 비석, 비석, 또 비석 사진이 이어졌다. 설명을 듣고서야 비석에 담긴 조선인 노동자들의 역사가 보였다. 안해룡 사진가가 왜 2018년 3월 발행된 〈타임〉을 들고 왔는지도 간파했다. 약물중독을 다룬 특별호였다. 〈타임〉지 95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진가 한 명의 사진으로만 지면 전체를 채웠다. “합시다.” 그 자리에서 8·15 특집으로 다루기로 했다.
안해룡은 1995년부터 일본 현지를 돌며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첫 사진 르포를 본 아버지가 의외의 증언을 들려줬다. 당신도 열여섯 나이에 강제징용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듣는, 아버지의 역사였다. 그해 안해룡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강제징용 루트’를 그대로 되짚어봤다. 그렇게 시작한 기획이 해를 거듭하며 이어졌다.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인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는 일본 내 약 160곳에 있다. 안해룡은 이 가운데 80곳을 직접 찾아갔다. 작업을 할수록 놀라웠다. 지금의 교통편으로도 찾아가기 쉽지 않은 오지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본 내 발행된 공식 문서와 문헌 등 자료를 찾아 역사적 해석을 더했다. 해석을 더하니 흩어진 점(비석)이 선(역사)이 되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 근대화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철도, 탄광,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졌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석탄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석탄 생산량 증가는 단순히 기술발전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력 덕분에 가능했다. 가장 위험한 철도공사 구간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전면 배치됐다. 발전소 건설 현장도 마찬가지다.
‘일본 덕분에 한국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일본 우익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 덕분에 일본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그 증거가 바로 일본 열도 곳곳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름이라고. 안해룡의 사진은 일본 근대화의 숨은 주역인 조선인 노동자의 기여를 생생히 보여준다.
이 기획을 할 때만 해도 한·일 갈등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8·15 특별호는 지면 기사 외에도 별도의 디지털 특별 페이지를 만들어 공개할 예정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도 볼 수 있도록 일본어 번역판도 제공된다. 일본 시민단체가 세운 비문을 인용하면, 〈시사IN〉은 8·15 특별호에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진실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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