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폐족’이 부활하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경기도지사 단일 후보 승리는 상징적이다. 민주당에서는 막판까지도 ‘설마’ 했다. 경기 토박이 김진표 전 부총리가 오랫동안 텃밭을 다져온 데다,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지지세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후발 주자인 유 전 장관이 막판 여론조사에서 승리를 따내자 정가에서는 다들 ‘노무현의 힘’이라고 해석한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 지방선거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프리미엄’이 작동한 사례는 이미 여럿이다. 민주당 안에서는 부천시장 경선에서 김만수 전 청와대 대변인이 막강 조직과 재력을 자랑하던 호남 출신의 김기석 전 국회의원을 이긴 것이나, 서울 성북구청장 경선에서 참여정부 비서관을 지낸 김영배 노무현재단 기획위원이 김근태 전 의원의 오랜 참모이자 현직 민주당 부대변인을 꺾은 사례 등이 다 ‘노무현 프리미엄’이 작동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뉴시스유시민 전 장관(오른쪽)의 경기도지사 경선 승리로 친노 인사가 야권의 주요 광역단체장 후보가 되었다.

후보 이력에 ‘노무현’만 들어가도 지지율 상승

민주당 내 경선 여론조사를 담당한 이인영 전 의원은 “후보 이력에 ‘노무현’이나 ‘참여정부’와 관련된 문구만 들어가면 여론조사 지지율이 무조건 5~15%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공무원법에 정해진 직함(비서관·행정관·인수위원)만 허용하고, 노무현 선대위 때의 특보나 무슨무슨 위원, 참여정부 국정자문위원, 노사모 직함 등은 아예 못 넣게 했다. 이것 때문에 욕 많이 먹었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사업을 주관하는 노무현재단은 이 문제로 긴급 이사회까지 열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노무현재단 ○○위원’ 타이틀을 달고 싶다는 민원이 하루에도 수십 통씩 쏟아졌기 때문이다. 양정철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은 “잘못하다가는 노무현재단 ‘기획위원’과 노무현재단 ‘자문위원’이 싸우는 볼썽사나운 모양새가 연출될 지경이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행사를 최대한 비정치적으로 치르려던 참이라, 당분간은 일절 새로운 직책을 내주지 않는 쪽으로 이사회에서 결론 내렸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몇 차례 거르는 장치가 있었는데도 친노 인사가 대거 본선에 진출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한명숙(서울)·유시민(경기)·안희정(충남)·이광재(강원)·김정길(부산)·김두관(경남) 후보가 이른바 ‘친노 벨트’를 형성했고, 기초단체장 후보 중에서는 40~50명이 친노 후보로 분류된다.
‘노무현 디스카운트’에서 ‘노무현 프리미엄’으로의 극적인 전환. 그 변곡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였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시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를 찾아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500만 추모객은 그 후 1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형태로 ‘노무현 팬덤’을 창출했다.

 

 

 

노무현 달력이 7만 개나 팔렸고, 노란색 무릎담요는 행사장마다 대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한 책은 출간되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올랐다(24~25쪽 딸린 기사 참조).
봉하마을을 찾는 인파는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2009년 7월부터 생가 쉼터 등을 재개장했는데, 매월 5만~10만명에 이르는 관광객과 추모객이 다녀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깔기로 한 박석(추모글을 새긴 돌)은 당초 1만 개를 분양하기로 했다가 신청이 몰려들면서 설계까지 변경해 1만5000개로 늘렸는데, 그것도 며칠 안 가 마감되었다. 노무현재단 게시판에 가면 ‘늦었지만 박석에 꼭 글을 새기고 싶다’는 애원성 글과, 이 글을 보고 혼자 서너 개를 분양받은 사람이 ‘한두 개 양보하겠다’고 댓글을 단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전직 국가 지도자의 묘역을 꾸미는 데 일반 시민이 이처럼 적극적이고 대규모로 참여한 경우는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노무현 기념품’도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대표선수는 노무현 달력과 무릎담요다. 수건·스카프·문구용품 등 10여 가지 ‘노무현 기념품’은 봉하마을에 있는 생가 쉼터나 추모 콘서트 같은 공식 행사장에 가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일반 유통망으로 판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연말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내부에서 소화하려고 소량 제작한 ‘노무현 달력’ 가운데 200부를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올린 게 ‘화근’이었다. 순식간에 품절되더니 대형 서점은 물론이고 G마켓, 11번가 같은 쇼핑몰과 지방의 작은 서점에서까지 주문이 쇄도했다. 노무현재단과 봉하재단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부랴부랴 만들어서 조달한 게 7만 개다. 1개에 1만원씩 받았으니 달력으로만 7억원을 번 셈이다. 당초 알라딘에서 “판매액의 50%는 노무현재단에 기부하겠다”라고 창을 띄웠는데, 누리꾼들이 “출판사가 50%는 왜 먹느냐?” “다 기부하는 데서 사겠다”라고 반발하는 통에 모든 판매 대행사가 100% 기부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강금원 창신섬유 대표가 원가에 공급하는 노무현 담요는 외부 행사장에서 인기 만점이다. 5월8일 서울 추모 콘서트에서는 준비한 500개가 금방 소화됐고, 5월5일 개관한 서울 추모관에서도 첫날 준비했던 100개가 세 시간 만에 동났다.

노무현재단을 직접 후원하는 회원도 계속 늘고 있다. 월 1만원씩 내는 회원만 2만5000명이다. 매월 최소 2억5000만원의 후원금이 들어온다는 얘기다. 노무현재단은 이렇게 해서 7개월 만에 50억원을 모았다. 기업이나 단체의 후원 없이 순전히 개인 후원만으로 이런 금액을 모은 비영리 공익법인은 전례가 없다.

‘지못미’ 수준의 반짝 열기라는 평가도

궁금한 건 이런 ‘노무현 팬덤’의 정체다.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차원의 시한부성 추모 열기라는 데 방점을 찍는다. 후원을 하면서도 불이익을 우려해 익명이기를 원하는 사람이 열 명 중 두세 명에 이르는 것이나, 노무현 팬덤이 친노 후보들의 지지도로까지 연결되지는 않는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이다. 친노 진영 안에서도 그렇게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친노 진영의 한 인사는 “‘반짝 추모’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개인적으로는 자서전보다 〈진보의 미래〉가 더 많이 팔렸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반대 해석도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물론이고 장기적으로도 ‘노무현 정신’을 뒷받침할 강고한 지지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신을 배우자’는 ‘노무현 시민학교’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나(22~23쪽 딸린 기사 참조), 유시민 전 장관이 단일 후보로 승리한 것 등이 그 전주곡이라고 주장한다. 시민주권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해찬 전 총리는 틈날 때마다 ‘백욕이 불여일표’(백번 욕하는 것보다 한 표 던지는 게 더 중요하다)를 외치며 투표 참여를 독려한다.
마치 2002년 광주 경선 때의 노무현을 보는 듯한 유시민 전 장관의 경선 승리, 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를 다시 보는 듯한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 이를 지켜보는 민심이 6월2일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노무현 프리미엄’의 정체도 함께 드러난다.

 

기자명 이숙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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