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자신의 현자 같은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이,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년)의 서문 첫머리를 아예 보기로 시작한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지영 그림

 


우리는 폭력을 이야기할 때,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눈에 보이는 폭력만 문제 삼는다. 하지만 한눈에 보이는 가시적 폭력보다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다.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과, 멀쩡해 보이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가 행사하는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꾼이 매일 도둑질했던 게 ‘손수레’였던 것처럼, 뻔히 보이면서도 장물로 감지되지 않는 그런 폭력이다.

사악한 범죄자나 억압적인 공권력, 광신적인 대중운동이 저지른 가시적 폭력만 문제 삼는 시선에는 착취당하는 노동자, 아프리카의 기아,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이 폭력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이처럼 가시적 폭력만을 문제 삼는 사람일수록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라는 신념을 내세우기 쉽다. 이를테면 그들은 빈약한 화력으로 무장한 채 경찰과 대치하는 파업 노동자나 재개발 지역 주민만 폭도로 보지, 그 사람들을 극단으로 내몬 구조적 폭력은 외면한다. 지젝은 이런 위선자들을 향해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구조적 폭력과 다름없다는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고용주의 변덕에 직면한 피고용자들의 불안과, 강탈적인 대기업의 공세에 생존권이 위태로운 자영업자의 곤궁한 현실로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지젝은 대의민주주의마저도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으로 간주한다. 그는 대개의 선거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관습과 견해의 영향을 받는다면서, 간혹 다수의 사람이 일시적으로 깨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투표를 하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놀라운 선거 결과가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라는 점은 선거가 진리의 수단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자유선거는 체제가 더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지젝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방법이 대의제 말고는 모조리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책임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닫혀 있는 정치 공간이 열린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젝은 이 책의 진정한 주제인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그러기 전에 독자는 이 책의 서문에 적혀 있는 ‘취급 주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거기서 지은이는 폭력이라는 메두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폭력으로 생긴 정신적 충격을 무시’할 것을 당부한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흡수되고 만다.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

 

 

 

 

〈폭력이란 무엇인가〉슬라보예 지젝 지음난장이 펴냄

 

지젝은 폭력을 긍정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발터 베냐민의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란 개념을 빌려온다. 신화적 폭력은 법을 만들거나 지키기 위해 행해지는 폭력이며, 이런 폭력의 가담자들은 자신의 책임을 ‘애국’이나 ‘안보’ 따위의 대타자에 전가한다. 반면 신적 폭력은 구조적인 폭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구조적인 폭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행하는 폭력으로, 신화적 폭력과 달리 자신의 폭력을 그 어떤 대타자에게도 전가하지 않는다. 예컨대 신적 폭력은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대타자의 무력함과 무능함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한 주체들은 모든 책임과 위험부담을 홀로 떠안아야 한다. 베냐민은 이런 폭력을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폭력’이자 ‘혁명적 폭력’이라고 일컬었으며, 지젝은 거기에 ‘사랑의 역사(役事)’라는 명칭을 달아준다. 

역사에 기록된 많은 폭력은 신적 폭력보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폭력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의 숙청과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대표적인데, 이명박 정권이 휘두르는 ‘법치’니 ‘공안정국’이니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자신의 무능을 가리려는 폭력에 가깝다. 정신분석에서는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위장하기 위한 행동을 ‘행위로의 이행’이라고 하는데, 시민운동가의 ‘행동하라’ ‘참여하라’ 따위 권고가 베냐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을 거세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행위로의 이행에 지나지 않는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한국어판 후기를 새로 써 보냈는데, 여기에는 이런 전언이 담겨 있다. ‘한국인이 지금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명박산성을 넘지 않고자, 그 앞에서 비폭력을 외쳐댔기 때문이야!’ 

놀랍게도 지젝의 삐딱한 시선에 발본색원된 보이지 않는 폭력 가운데는, 민주주의 사회의 미덕으로 권장되어 왔던 ‘관용’과 ‘정치적 올바름’도 포함된다. 그가 보기에 알카에다가 벌인 9·11 테러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이 벌인 고문 사례는,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과 무관한 야만끼리의 충돌이다. 사태를 그렇게 키운 것은 관용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현대의 이데올로기로, 관용은 ①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②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정치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는 관용과 자신의 견해는 바꾸지 않으면서 표현에만 신경 쓰는 정치적 올바름은, 미소 띤 얼굴 뒤에 야만을 키워왔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서로를 성인으로 취급하고, 책임을 물리면서, 예의 바른 비판을 하는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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