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예상 밖인데요? 아무래도 더 상세하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1차 분석 결과를 받아든 트리움의 김도훈 대표는 묘하게 흥분된 목소리였다. 1차 분석으로 손에 쥔 그래프는 누가 보기에도 결론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프로젝트였다. 〈시사IN〉과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회사 트리움은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 분석(〈시사IN〉 제367호 커버스토리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에 이어, 양대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와 다음의 여론 지형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포털 사이트는 거의 모든 인터넷 이용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는 공간이다. 이 분석은 흥미롭다기보다는 그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직관을 데이터로 뒷받침하는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직관이란 이런 식이다. 네이버는 보수, 다음은 진보, 보수가 “네이버는 평정됐다”(이명박 캠프 진성호 뉴미디어분과 간사)라고 선언하던 2007년 네이버의 보수 결집, 그 직후 다음의 진보 대항 결집, 정치 성향에 따른 포털 선택, 2012년 대선과 같은 대형 정치 이벤트가 있을수록 뚜렷해지는 포털 여론 양극화….
 


〈시사IN〉과 트리움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해마다 정치 분야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20개씩을 추출했다. 각 기사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 5개씩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1년에 댓글 100개, 7년치 댓글로 700개, 두 포털을 합쳐서 1400개다.

포털 사이트에서 기사를 읽는 독자가 스크롤을 내려 최다 추천 댓글을 확인할 때, 최다 추천 댓글이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면 의견을 강화하고 반대되면 약간이라도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소한 효과가 충분히 누적되면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 분석 대상 댓글을 각각 ‘여당 성향’ ‘야당 성향’ ‘중립 성향’으로 분류해 추이를 그려 보았다. 그 결과가 아래쪽 〈그림 1〉이다.

당장 몇 가지 통념이 깨져나간다. 첫째, 2007년은 물론 2008년까지도 네이버는 ‘평정’되지 않았다. 네이버의 여론 지형에서 보수 결집이 확인되기 시작하는 것은 2009년이다. 둘째, 결집은 네이버보다 다음이 먼저다. 다음의 진보 우위는 2008년에 시작되어 2013년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셋째, 이번 분석에서 가장 의외였던 대목으로, 네이버의 보수 우위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 대선이 있던 2012년의 네이버는 양극화가 강화되기는커녕 보수, 진보 양쪽 여론이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좁아진다.

 

 

 

 


야권 성향 이용자의 다음 결집은 2008년 이후 흔들린 적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네이버였다. 네이버는 정치 성향으로 선택하거나 외면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생활밀착형 포털이다. 뉴스 페이지라고 해도 보수의 일방적인 놀이터가 되기 힘들 정도로 이용자가 많다.

더 상세한 데이터가 필요했다. 흥미로운 패턴을 보여준 2008~2013년의 네이버로 분석 대상을 좁혔다. 월 단위 여론 동향을 보아야 그림이 보일 것 같았다. 분석 대상 기사를 한 해에 20개에서 한 달에 20개(월간 최다 조회)로 12배 늘렸다. 이제 분석 대상 댓글은 한 달에 100개, 6년 합계 7200개로 늘어났다. 개인의 이용 경험을 일반화하는 인상 비평이 아닌, 데이터에 기반해 포털 여론 지형도를 그려보는 시도다.

1기:그랜드 크로스는 촛불의 유산인가

월 단위로 상세 분석한 데이터를 분기별로 모아 정리한 결과가 24~25쪽 〈그림 2〉이다. 그래프를 보면, 2008년부터 2013년까지 6년 동안 네이버의 여론 흐름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보수가 처음으로 우세를 잡은 1기(2008년), 보수 우세가 압도적으로 유지되는 2기(2009~2010년), 보수 우세가 완화되면서 경합세가 나타나는 3기(2011~2013년)다.

1기 중에서도 2008년 2분기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휘몰아치던 시기다. 이때에는 ‘최다 조회 기사·최다 추천 댓글’의 74%가 야당 성향이다.

 

 

 

 

 


반전은 3분기부터 일어난다. 2분기에 정점을 찍은 촛불집회의 기세가 꺾이고, 대책 없이 밀리던 보수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금강산 관광을 갔던 박왕자씨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도 3분기(7월11일)에 있었다. 3분기 들어 야당 성향 댓글의 비중은 51%로 떨어지고, 4분기가 되면 23%까지 떨어진다. 반면 여당 성향 댓글은 22%(2분기), 38%(3분기), 49%(4분기)로 올라간다. 2008년 4분기에 온라인 여론 지형의 ‘그랜드 크로스’가 일어났다. 이후 네이버의 보수 우위는 15분기 연속으로 이어진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은 6월19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들었다”라며 대국민 사과를 하던 장면이었다. 시민의 역량은 최대치를 발휘하고 있었고(바꿔 말하면 시민의 자발성에 더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시점이었고), 대통령의 사과와 정책 전환 약속까지 받아냈다. 정말로 집권 1년차 정부를 끌어내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때가 집회를 매듭지을 최적기였다.

하지만 당시 야권은 치명적인 리더십 공백을 겪고 있었다.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은 촛불집회장에 나오면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시민들에게 쫓겨나다시피 했다. 민주노동당(현재는 정의당과 통합진보당으로 분화) 인사들은 무대 위에 올라갈 자격을 얻었지만, ‘질서정연한 퇴각’을 기획할 권한도 의사도 없었다. 시민사회가 주축이 된 범국민대책본부는 집회를 이끈다기보다는 얹혀간다는 평가가 정확했다.

집회를 매듭지을 힘은 누구에게도 없는데 시민의 에너지는 들끓고, 리더십을 재구성할 전국선거마저도 한참을 남겨둔 상황. 촛불은 이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립되면서, 격해지고, 결국 사그라졌다.

‘그랜드 크로스’의 시기에 보수는 집요하게 촛불집회의 취약점을 파고들면서 담론을 형성했다.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한 키워드가 ‘촛불좀비’다. 좀비는 떼로 몰려다니며 공포와 혐오를 주고, 무엇보다 뇌가 없다. 보수가 보는 촛불집회의 풍경이 이랬다. 6월 한 기사의 최다 추천 댓글은 “이번에 좀비들 봐라. 〈PD수첩〉, 공기전염론, 600도설에 죄다 푸득푸득 낚여가지고”라고 썼다.

특히 박왕자씨가 금강산에서 피살된 7월 이후 ‘좀비’는 보수가 진보를 조롱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박왕자씨 관련 기사의 한 최다 추천 댓글은 “초 하나씩 준비해라 좌빨 좀비들아. 오늘부터 금강산 원정이다”라고 쓴다. “왜 우리 국민이 북한군에 총을 맞은 사건에 촛불좀비들은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논리가 곳곳에서 변주된다. 바탕에는 “너 친북이지?”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용산참사, 박왕자씨 금강산 피살, 박근혜 대통령 당선(왼쪽부터 시계 방향) 때 네이버에서 여당 성향 댓글이 우위를 보였다.

 


촛불좀비론 외에도 이중잣대론(“쇠고기 협상은 노무현 정부에서 했는데 왜 지금 난리냐”)이 틀을 갖춘다. 정권 퇴진 구호가 촛불집회 후반으로 갈수록 전면에 등장하면서, 진보를 ‘습관성 정권퇴진 선동세력’으로 낙인찍는 논리도 등장한다. 정권 퇴진은 헌정체제를 중단하자는, 그야말로 비상한 시국에서 꺼내야만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카드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진보 일각의 극단주의 그룹은 ‘정권퇴진론의 일상화’라고 할 만한 습관적 퇴진론을 보여주었다. 이는 보수 담론에 좋은 먹잇감을 제공했다.

보수의 주력 담론은 촛불에 대한 비판과 조롱으로 형성되었다. 온라인에서 이런 담론상의 우위는 이후로도 2년 넘도록 공고하게 이어진다. 적어도 담론 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2008년에 진정으로 중대한 시점은 촛불이 아니라 ‘촛불 이후’였다.

2기:보수의 압도 속에 일베의 맹아 탄생

2기(2010~2011년)는 보수의 태평성대라 부를 만하다. 최다 추천 댓글의 80% 이상을 보수가 차지하는 압도적인 우위를 누렸다. 전체 8분기 중에서 80%를 밑도는 경우는 한 번(2010년 3분기,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한 직후다)뿐이고, 90%를 넘긴 적도 두 번 있다(2010년 1·2분기). 정권이 휘청거릴 만한 메가톤급 이슈가 터져도 네이버 여론은 요지부동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인 2009년 2분기 여당 성향 댓글 비중은 83%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3분기에는 85%로 더 올라갔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시기는 강력한 지역주의 코드인 ‘홍어’라는 딱지 붙이기가 추천 댓글에 본격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보수는 몇 가지 무기를 정교하게 벼려낸다. 이중잣대론, 무임승차론, 선동론 등이다. 하나같이 진보에 붙이는 딱지다. 온라인 보수의 눈에 비친 진보는 “노무현이 한 건 뭐든지 업적, 이명박이 한 건 뭐든지 죽일 일”로 간주하는 이중잣대를 쓴다. 진보는 “세금을 축내 제 앞길만 챙기는” 무임승차자들이고, “선동꾼들의 말에 휘둘려 습관처럼 정권 퇴진을 외치는 뇌가 없는” 이들이다. 한때 진보가 갖고 있던 지적·도덕적 우위는 철저하게 해체된다.

이 시기의 최다 추천 댓글에 무임승차 혐오 코드와 지역주의 코드, 이중잣대론 등이 체계화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이 고스란히 일베식 논리 구조의 뼈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시사IN〉은 일베 분석(제367호)에서 ‘무임승차 혐오’를 일베가 가진 논리 구조의 핵심 코드로 지목한 바 있다. 이 시기의 네이버는 훗날 일베를 뒤덮게 될 코드들의 맹아를 보여준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자연스러운 궤적이기는 하다. 2009년 1분기에 여당 성향 댓글의 비중은 85%로, 직전 49%에 비해 36%포인트나 치솟는다. 분석 대상인 6년 24분기 중에 댓글 성향의 변화폭이 가장 큰 시기가 여기다. 더욱이 2009년 1분기는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시기다. 정권에 대형 악재가 터진 바로 그 시점에, 네이버의 여론은 압도적 보수 우위로 전환되었다.

부자연스러운 대목은 또 있다. 2009년 이후 최다 추천 댓글에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찬양이 부쩍 눈에 뜨인다. 분노와 냉소가 주를 이루는 온라인 공론장에서 대통령 찬양이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 이례적이다.

촛불집회에 크게 혼쭐이 난 이명박 정부가 국가정보원 등을 통해 전방위적 온라인 여론전을 기획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09년 1분기 이후의 그래프 궤적과 댓글 내용을 보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대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 댓글과 추천의 유입 경로 분석은 추후에 남겨진 숙제다.

인위적 개입의 가능성을 고려한다 해도, 이 시기 야당과 진보 엘리트가 대항 담론 생산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네이버에서 야당 성향 누리꾼은 네이버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여론전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손에 쥔 무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3기의 여론 지형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3기:보수 우위에서 혼전으로…

보수 우위가 요지부동이던 네이버 여론 지형에 변화가 감지된 것은 2011년 1분기다. 이 시기에 야당 성향 댓글의 비중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7%), 여당 성향 댓글 비중이 돌연 63%로 떨어진다. 2분기에는 야당 성향 댓글이 18%로 올라가고, 여당 성향 댓글은 49%까지 떨어진다.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절반 아래로 내려왔다.

이 시기는 이명박 정권의 인기가 바닥을 기면서 야당이 다음 해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던 때다. 2011년 4분기에는 야당 성향 댓글 비중이 21%를 기록해, 2009년 이후 처음으로 20%를 돌파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승리한 것이 이때다(2011년 10월). 이 선거 직후 ‘안철수 현상’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나꼼수 열풍’도 절정기를 구가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자료〈/font〉〈/div〉2008년 촛불시위,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안철수 현상(왼쪽부터) 때 네이버의 야당 성향 댓글이 증가세를 보였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선전하면서 야당 성향 댓글의 상승세도 잠시 주춤했지만, 결국 2012년 3분기에 재역전이 일어난다. 무려 16분기 만이다. 야당 성향 댓글 36% 대 여당 성향 댓글 32%로 나타났다. 대선 국면에서 네이버의 보수·진보 여론이 거의 비등한 선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는 분석 결과는 기존 통념을 뒤흔든다.

“포털의 성향 자체가 양극화되었다”라는 통념이 옳다면, 대선과 같은 치열한 전쟁 국면에서 네이버와 다음의 양극화는 더 두드러져야 한다. 하지만 대선 국면에 접어든 네이버에서는 야당 성향 댓글이 최다 추천까지 치고 올라올 정도로 힘을 발휘했다. 이런 현상이 다음에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다음의 진보 우위는 대선 때인 2012년에도 공고하다. 다음이 진보 성향 이용자들이 의식적으로 구축한 진지라면, 네이버는 일상적 생활공간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결국 네이버에는 40% 가까운 야권 성향 이용자가 잠재되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안철수 현상이나 대선과 같은 초대형 이벤트가 발생하면 이 잠재 야권층이 고개를 드는거죠. 이건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네이버의 진보 이용자도 움직입니다. 둘째, 2009~2010년의 일방적 보수 우위는, 진보 이용자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담론 전쟁에서 할 말이 없어서 나온 결과일 수 있습니다.” 김도훈 대표의 분석이다.

촛불집회나 대선과 같은 ‘빅 이벤트’는 별다른 담론 없이도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일상적인 국면에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때는 누가 더 공감대 높은 담론(그것이 정제된 언어로 드러나든 욕설에 가까운 거친 댓글 아래 숨어 있든 간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여론전의 양상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 일상 국면에서 쌓아 올리는 신뢰와 불신이 결국은 큰 선거의 결과도 결정한다.

야권 지지 여론은 철저하게 이벤트에 의존한다. 야권 지지층이 힘을 내는 장면은 촛불집회, 안철수 현상, 대선 단일화 국면 등으로, 모두 외부 변수다. 2011년에는 야권 성향 이용자들이 먼저 나서서 추천 댓글로 안철수를 ‘발굴’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야당과 진보 엘리트가 공론장의 담론을 이끄는 모습은 6년 내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야권이 담론을 주도한 사례로 거론되는 무상급식 이슈조차도 온라인 여론 지형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2010년 2분기). 40%의 잠재 지지층을 고려하면, 보수의 인위적 개입 하나만으로는 이런 ‘완패’를 설명하기 힘들다. 문제는 네이버 이용자가 아니라 담론 공급자였다.

보급 없이 맨손으로 싸워야 하는 보병들

분석 결과, 네이버의 보수화는 흔히 생각하듯 ‘보수 누리꾼의 분탕질 효과’ ‘진보 누리꾼의 환멸과 이탈’ ‘보수 세력의 조직적인 개입’과 같은 원인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같은 통념은 어쨌든 네이버 이용자, 즉 수요자를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용자는 고정되어 있고, 일관되게 보수 성향을 보일 것이라고 쉽게 가정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분석은 야당과 진보 엘리트, 즉 ‘공급자의 실패’를 네이버 보수화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한다. 야당의 리더십 실패는 촛불집회의 지리멸렬한 결말로 이어졌다. 이는 촛불 이후 여론 지형의 거대한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담론 생산능력 파산은 야권 지지층을 갈수록 외부 이벤트에만 의존하도록 강제했다. 

여론전이라는 전투에서 누리꾼은 보병이다. 이들이 전장에 나가려면 설득력 있고 매력 있는 담론이라는 군수품이 필요한데, 그것을 생산해줘야 하는 야당과 진보 엘리트가 지독한 기능장애에 빠져 있었다. 군수품을 보급받지 못한 보병들은 2년 동안 몰살당하다시피 하다가, 급기야는 군수품을 자체 조달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분석 결과는 보수에게도 희소식이 아니다. 마치 ‘촛불좀비’라는 한마디로 간단하게 진보를 제압할 수 있었던 2009년처럼, 2013년 이후에는 보수 성향의 주장들이 한 단어로 제압당하는 흐름이 관찰된다. ‘일베충’이다. 촛불의 극단화 현상이 보수에게 ‘촛불좀비’라는 무기를 쥐여주었듯이, 일베로 대표되는 보수 담론의 극단화 현상이 이제는 보수의 약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보수 역시도 매력 있고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만한 긍정적인 담론 생산에 실패하면서, 2009~2010년의 ‘영광’을 가져다주었던 조롱과 냉소에 갈수록 더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 역시 진보가 반이명박 정권퇴진론에 습관적으로 의존하던 모습과 판박이다.

성공하는 담론은 열광적 지지자를 끌어들이고, 담론은 이들의 열광에 떠밀려 점차 극단화된다. 이 경로에 접어들면 다수 대중의 감수성과는 멀어지는 ‘그들만의 논리’를 재생산하게 된다. 진보의 ‘민주화’ 담론은 이런 경로를 거쳐서 촛불집회 이후 결정적으로 담론 공간의 주도권을 박탈당했다. 보수의 군수창고에는 아직 ‘성장’과 ‘반북한’이라는 재고가 조금 남아 있다. 하지만 신규 생산이 멈추고 기존 담론의 극단화 경로로 접어든 것은 여기도 마찬가지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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