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물고기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 자기만의 문제인지, 다른 이들도 아픈지 궁금해서 큰 물고기에게 물었다. “물이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큰 물고기가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물이 뭐냐?”

무지 또는 부인. 우리가 우울증을 대하는 자세다. 일단 ‘우울’이라는 단어 자체가 헷갈린다. 비가 와서 소풍이 취소된 아이의 기분과 자살 직전에 처한 사람의 감정을 동일하게 표현하는 언어적 단순함 때문에 많은 이가 정신질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신체 부위에 이상이 생기면 엄청난 첨단 의료장비로 검사를 받지만, 우울증이 의심되면 20세기에 만들어진 설문지에 답하고 처방전을 받는다. 정신과 진단이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이유는 아직도 우울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현대 의학이 지난 20여 년간 고수해온 화학적 치료 방법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인 2억2000만명이 처방 의약품을 복용 중이고, 그중 4000만명 이상이 항우울제를 먹고 있다. 하지만 약물치료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관행에는 문제가 많다. 대다수 항우울제에는 불쾌한 부작용이 동반되고 효과 역시 안정적이지 못하다. 무엇보다 오늘날 의학계는 뇌의 어느 부위에서 어떤 화학적 또는 전기적 작용이 특정 환자의 우울증을 유발시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결국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에 의존해서 약물치료를 하는데, 이는 라이플(소총)이 아닌 산탄총으로 사냥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밀 타격과는 거리가 먼 해결책인 것이다.

ⓒ시사IN 자료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뇌의 오작동’이다. 상당히 복잡하고 복합적인 질환이고 그 유형 역시 다양하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심리적이면서 화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전문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가설로 우울증을 쉽게 설명해보면, 유전자 안에 잠복해 있던 우울증 씨앗은 외부의 충격에 의해 적합한 토양이 조성되면 싹을 틔우고 자라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은 사회적 전염성이 강한 정신질환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지식으로 우울증의 씨앗을 솎아내는 작업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그 씨앗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시도해야 할 것이다.

항우울제 처방전을 남발하는 관행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바로 우울증을 쉬쉬하며 숨기는 풍습이다. 얼마 전 OECD는 자살률 1위 한국의 항우울제 사용이 꼴찌에서 두 번째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우울증에 대한 한국의 사회적 대처가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보여주는 결과다. 항생제는 사탕처럼 먹지만 항우울제는 기피하고, 또 복용하는 사실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감추려 든다. 무한경쟁 승자독식 체제에서는 생산적인 활용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생산력이 떨어지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정신병을 노출하는 순간 시장에서 도태된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이 외형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은 한국 사회를 상당히 비합리적으로 작동하게 만든다. 실력보다는 학력을 중시하는 불변의 전통과 요즘 유행하는 ‘있어빌리티(있어 보이는 능력)’에서도 드러나듯이 내용보다는 형식에, 본질보다는 포장에 치우친 현상은 어느새 한국 사회의 규범이 돼버렸다. 콘텐츠보다는 시그널에 의존하며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을 하는 것이 기본값이 된 사회는 어쩌면 이미 구성원들의 자신감 상실을 방증하는지도 모른다.

ⓒ연합뉴스2월13일 서울 시민청에 설치된 마음 치유 자판기 ‘마음약방’ 앞에 사람들이 서 있다. 마음약방은 이용자의 마음 상태를 살펴 소소한 재미와 스토리가 있는 물품을 처방하는 자판기다.

불안과 좌절은 우울증을 키우는 ‘비료’

이런 자신감 결여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욕망의 머슴인 불안은 가진 자, 없는 자를 가리지 않고 공략한다. 정당성이 없는 기득권이 특권과 반칙을 동원해 역사적 내러티브로 자신들을 치장하려는 발상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저성장이 고착된 실망스러운 경제 상황은 ‘흙수저’와 ‘금수저’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대다수가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좌절한다. 불안과 좌절이 반드시 우울증으로 직결된다는 공식은 없지만, 우울증을 키우는 비료 구실은 충실하게 해낸다는 데 상당수 의사들이 동의한다.

미개한 사회일수록 미지를 두려워하고 외면한다. 우울증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비이성적인 태도를 독특한 근대사와 전통문화에서 파생된 모순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기이함이 과하다. ‘헬조선’이라서 아픈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아팠기 때문에 헬조선이 된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 또는 기쁨이 아닌 활력이다. 영어로 경제공황과 우울증이 동일어(depression)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에서 의학적으로 정밀하지 않은 약들을 과잉 처방하며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세력이 있듯이, 한국에서도 ‘활력을 잃고’ 위축된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현실을 착취하는 세력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판단하기 전에, 주변에 XX 새끼들만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확인하라.” 소설가 윌리엄 깁슨이 남긴 명언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비밀과 침묵은 우울증을 치유할 수 없다. 정신질환인 우울증은 반드시 현대 의학에 의존해 치료받아야 한다. 결코 정신력으로 극복하거나 우주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책적인 제도 마련보다 시급한 것이 사회적 체질의 개선이다.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방법으로는 ‘자신과의 소통’을 통한 기록과 관리가 있다. 뇌와 정신질환에 대한 기초 교육을 통해 무엇이 정신건강에 해로운지를 파악하고, 개개인 모두가 자신을 객관화해 관찰하는 습관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다 의심되는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정신과를 찾는다. 우리가 샤워하고 양치질하며 위생을 관리하고, 미세먼지가 심한 지역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외출 후에는 손을 씻듯이 각자의 감정적 ‘웰빙’을 의식하고 챙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우울증에 걸렸을 때 주변과 상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저절로 형성된다. 마치 독감이나 식중독에 걸렸을 때 우리가 숨기지 않고 지인들에게 솔직하게 알리듯 말이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정신질환을 인지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다양한 유형의 우울증을 하루아침에 정복할 수는 없겠지만, 죽을죄를 지은 사람들도 아닌 환자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리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단기적인 목표는 우울증이라는 질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상태와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는 단계로 가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우리가 위로받는 이유는 우리가 사소한 것에서 상처받기 때문이다. 칫솔이라는 사소한 발명품은 인간의 기대수명을 엄청나게 늘렸다. 사소한 습관이 사회적으로 축적되면 관습이 되고 결국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인류사를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물에서 살고 있다. 물이 뭔지를 알아야 수질도 파악할 수 있다. 더 건강한 삶을 희망하는가? 우울증을 직면하고 알아가자. 그러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정승구 (영화감독·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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