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양조장’이 생겼다. 정확하게는 양조장을 겸비한 막걸리집이다. 이 금싸라기 땅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들어섰다. 외관만 보면 고급 한정식집이나 유러피안 레스토랑을 떠올리게 한다. 웬 돈 많은 자영업자가 호기롭게 술집 하나 차렸나 싶은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먼저, 이 집에서 맛볼 수 있는 우리 술(막걸리와 전통주) 리스트가 무려 200여 종에 이른다. ‘남해다랭이팜 막걸리’ ‘술취한 원숭이’ ‘호모루덴스’ 같은 낯선 막걸리가 즐비하다. 술깨나 마시는 이들이라면 이 집의 술 리스트만 봐도 행복할 것이다. 1층에는 전국 각지의 전통주를 모아 전시해두었고, 지하에는 양조장 설비를 갖추어놓고 관련 부처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허가가 나는 대로 전국에서 암약 중인 ‘가양주’ 전문가들이 이 양조장에서 직접 술을 빚어 손님에게 맛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국내 최초의 ‘도심형 양조장’이 탄생하는 셈이다. 지하 1층과 야외 테라스에서는 경기도 가평에서 생산되는 하우스 맥주도 맛볼 수 있다. 조만간 술집 한쪽에 우리 술 판매점도 낼 생각이다. 건물 전체가 온전히 우리 술을 위해 꾸며졌다.

ⓒ시사IN 이명익

‘백곰막걸리&양조장’ 대표 이승훈씨(39)는 ‘우리 술’에 미친 사람이다. 한 대기업에서 축산·수산 MD(상품기획자)로 일했던 그는 몇 해 전 회사를 그만두고 우리 술의 세계에 빠졌다. 원체 술꾼이었던 데다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만난 다양한 전통주의 존재가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열악한 현실에서도 자기 색깔을 지키고 있는 영세한 양조장에 도움을 줄 방법이 뭘까 생각했다. 사단법인 막걸리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서울 한복판에 우리 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첫발’을 떼기로 했다. ‘백곰막걸리&양조장’ 공동 대표인 아내 유이진씨(32)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술 전문가다. 두 술꾼 부부가 모여 큰 사고를 쳤다.

막걸리 열풍이 최고조에 이른 건 2008~ 2009년이었다. 막걸리가 건강한 술로 인식되면서 막걸리 전문점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때 와인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대체재로까지 이야기됐지만, 거품은 소리 소문 없이 걷혔다. 여전히 자기 색깔을 유지하며 선전하고 있는 곳은 ‘세발자전거’ ‘월향’ ‘얼쑤’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막걸리 열풍이 잠잠해졌다고 생각하는 사이, 바닥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 술 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 스스로 술 빚기에 나서면서 토대가 단단해졌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한 특색을 지닌 우리 술이 등장했다. 이를테면 요즘 잘나가는 클럽에서 즐겨 마신다는 ‘르칼롱’이 전남 담양의 술도가에서 만들어진 전통주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승훈 대표는 이 술들이 지닌 ‘스토리’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이다. 헛헛한 저녁, 이 집을 찾아 궁금한 술의 이력을 물어보라. 그가 밤새도록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술도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는 우리 술에 아주 곱게 미친 사람이니까.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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