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어느 세월호 민간 잠수사의 죽음

고 김관홍 잠수사의 마지막 소원

정부에 푸대접 받아온 세월호 ‘민간’ 잠수사

 

 

6월17일 김관홍 세월호 민간 잠수사가 숨졌다. 4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1세(딸), 9세(딸), 7세(아들) 3남매가 빈소를 지켰다. 빈소에서 어른들은 3남매의 어깨를 꼭 붙들어 챙겼다. 막내는 화장실에도 혼자 가지 않았다. 발인 때 고인의 동료와 친지는 운구를 하고, 어머니가 오열하며 뒤따랐다. 유가족과 시민 50여 명이 영구차를 향해 묵념할 때도 일곱 살 아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팔에 찬 삼베 완장은 제 허리둘레만 했다.

김 잠수사의 마지막 모습은 비닐하우스집 안에 설치된 CCTV에 잡혔다. 경찰의 CCTV 분석에 따르면 김 잠수사는 새벽 2시15분 경기도 고양시 비닐하우스 자택으로 돌아왔다. 홀로 1시간30분가량 술을 마시던 그는, 약통에서 무언가 꺼내 먹은 뒤 갑자기 쓰러졌다. 현장에서 약통이 발견됐으나 약은 남지 않아 그 성분을 알 수 없다.

ⓒ시사IN 조남진고 김관홍 잠수사의 발인이 지난 6월19일 서울시립서북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비닐하우스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김관홍씨는 2014년 세월호 참사 피해자 수습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다. 그를 비롯한 민간 잠수사 25명은 침몰한 세월호 선체에서 시신 292구를 인양했다. 이들은 크고 작은 고초를 겪었다. 대다수가 부상과 우울증을 겪고 있다. 동료 잠수사의 사망으로 기소를 당해 재판받는 잠수사도 있다(〈시사IN〉 제430호 ‘목숨 걸고 나선 대가가 소송이라니’ 기사 참조). 김관홍씨는 이들의 ‘대변인’ 격이었다. 2년 넘게 그는 정치권과 언론, 시민·사회단체에 세월호 민간 잠수사들의 실태를 알려왔다.

김씨가 진도 팽목항 세월호 침몰 현장에 도착한 때는 2014년 4월23일, 사고 일주일 뒤였다. 순전히 ‘자원봉사’로 갔다. 해경과 계약을 맺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해 10월12일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뉴스를 보니까 이성적으로 (돈 문제를) 생각할 수 없었다. 작업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모르기도 했다”라며 팽목항으로 향한 때를 회상했다. 2시간에 걸친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현장에 늦게 도착한 것을 ‘변명’했다. “애가 셋이다. 아내 눈치를 봐야 했다(이하 고딕체로 표기된 부분은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날것 그대로 싣는다).”

알고 지내던 동료 잠수사 4명을 데려갔으나 동료들은 일찌감치 현장을 떴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환경에 질려서다. 잠수사 한 사람은 떠나면서 김씨에게 “이건 죽으려고 하는 잠수지, 살려고 하는 잠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애기들 생각 안 하는 날이 없다”

실제로 김관홍 잠수사는 도착 일주일 만에 죽음에 맞닥뜨렸다. 잠수 도중 정신을 잃고 호흡이 끊어졌다. 그는 “잠수해서는 안 되는 물때에 들어갔다. 해경이 강요해서다”라고 주장했다. 동료 잠수사들이 인공호흡을 하고 김 잠수사를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사흘 입원 치료를 받은 뒤, 그는 다시 현장에 나타났다. 더 가벼운 사고에도 짐을 챙겨서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최고참이던 공우영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죽을 뻔한 사고를 당하고도 돌아왔기에 ‘괜찮냐?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사람 부족한 것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냥 가나? 잠수 안 하고 위에서 호스라도 잡고 있게 해달라’고 하더라.” 작업은 계속됐다. 잠수사들은 하루 한 차례도 힘든 잠수를 대여섯 번씩 했다. ‘잠수를 한 뒤 최소 12시간 휴식해야 한다’는 원칙을 어겼다.

“해경 강요도 있었지만, 물때가 좋을 적에는 잠수사들이 알아서 수차례씩 들어갔다. (물)밑에 애들을 보고는 소실될까 봐 안 꺼내올 수가 없었다. 물속에 안 들어가본 사람은 모른다.”

현장에 있던 동료는 김씨가 ‘분위기 메이커’였다고 말했다. 25명 가운데 중간 연배이던 그는 고참과 신참을 잇는 가교 구실을 했다. “늘 죽음을 생각했던” 현장이지만 김씨 덕에 웃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김관홍 잠수사가 무너진 것은 작업 마지막 날이었다. 동료 잠수사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7월 초에 해경이 우리더러 바지선을 떠나라고 했다. 작업 방식을 바꾼다는 이유였다. 소식을 듣고 (김)관홍이가 엉엉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직 물속에 11명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나가란 말이냐’고.”

ⓒ공우영 제공고 김관홍 잠수사(오른쪽)를 포함한 민간 잠수사들은 침몰한 세월호 선체에서 시신 292구를 인양했다.

“제일 중요한 건 정부가 할 역할을 안 하는 거다. 막말로 구조를 안 했다. 다 살릴 수 있는 애들을 안 살렸다. 민간인들이 와서 어떻게든 도와주려 한 것 아닌가? 뭘 바라고 한 건 아니다. 요구한 적이 없다.”

김관홍 잠수사는 세월호 참사 전엔 수중공사 일을 했다. 수중에서 토목 구조물을 절단하고 인양하는 것이 김 잠수사의 특기였다. 전문 인력이 드문 분야라서 벌이도 괜찮았다. 그러나 세월호 수색 현장에 참여한 뒤 김씨는 20년 동안 해온 잠수를 그만뒀다. 몸이 견디지 못했다.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생기고 어깨 회전근막이 파열됐다. 치료비 지원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옛 수난구호법은 장애나 사망의 경우에만 보상금을 지급했고, 4·16 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특별법)도 민간 잠수사들을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잠수사는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했다. 한동안 소변이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아 기저귀를 차고 운전한 적도 있었다. 사흘 잠수해서 벌던 돈보다 한 달 수입이 더 적었다. 몸이 아픈 만큼 정신적 외상(트라우마)도 컸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운전 일을 마치면 새벽 5시까지 무작정 걸어다녔다. 눈을 감으면 바다 밑 참상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 대리운전을 부른 손님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뭐가 즐거울까?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술을 마시고, 웃고 다닐까?’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집에서 잠을 못 자고 길바닥에서 새벽 4시, 5시까지 헤매고 다니는데? 나는 하루에 한 번도 세월호 애기들 생각 안 하길 바라는데, 한 번도 생각 안 하는 날이 없다.”

후유증에 시달리던 김 잠수사가 ‘세월호 활동가’로 변모한 것은 지난해 국정감사부터다. 지난해 9월15일 김관홍 잠수사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현업으로 복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부상을 입은 ‘형님’들이 치료비 지원을 못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수색 현장에서 수색하다 숨진 이광욱 민간 잠수사의 죽음과 관련해 검찰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한 공우영 잠수사의 무죄도 주장했다. 김씨는 “(동료 잠수사의 죽음을)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왜 그게 저희 민간 잠수사입니까? (중략) 저희가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앞으로)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라고 말했다. 구조에 무능했던 해경과 청와대의 대처와 비교되면서,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말라’는 그의 말은 울림이 컸다.

“사회 지도층인 당신들은 왜 기억이 안 납니까?”

해경의 ‘위증’도 김 잠수사 증언으로 드러났다. 해경은 공우영 잠수사가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언딘 소속 잠수사라고 주장했다. 공 잠수사에게 현장 지휘의 책임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국정감사에서 홍익태 해양경비안전본부장은 “기소된 공우영 잠수사가 언딘에 고용됐으며 그를 통해 더 많은 잠수사가 고용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관홍 잠수사가 “공 잠수사는 언딘 소속이 절대 아니다. 위증이면 내 생명을 내놓겠다”라고 부인하자, 홍 본부장은 “잘못 확인한 부분이었다”라고 말했다.

“당장 우리가 재판받고, 치료 못 받는 것? 큰 울타리로 보면 중요하지 않다. 이 사회(전체)가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것, 그게 문제지. 세월호는, 세월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의 현 모습이다.”

지난해 12월16일에는 1차 세월호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사흘에 걸친 청문회에서 해경 관계자를 비롯한 증인들은 자주 대답을 회피했다(〈시사IN〉 제432호 ‘수백명 수색한다더니 죄다 거짓말이었어’ 참조). 특조위원의 질문에 답하던 김관홍 잠수사는 마무리 발언으로 이를 꼬집었다. “고위 공무원들에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 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들께서는 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는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 아닙니까?”

김씨는 지난 총선 때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후보(서울 은평갑)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따로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 박 의원과 만남을 주선한 이는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었다. 박래군씨에 따르면, 김씨는 “누군가는 국회에서 세월호 참사 문제를 계속 제기해야 한다”라며 자원봉사에 동참했다. 서울 은평구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박주민 후보의 운전기사 겸 수행 비서를 맡았다. 수색 현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선거 캠프에서도 김 잠수사는 활력소 역할을 했다. 사망 전날 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들도 선거 캠프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이어진 회식 뒤 김 잠수사는 비닐하우스로 귀가했고, 혼자서 마지막 술자리를 가졌다. 박주민 의원은 “김 잠수사는 항상 밝고 농담을 즐겼다. ‘박주민 후보 당선에만 정신을 쏟다 보니 2년 만에 처음으로 잠이 잘 온다’고 했다. 이렇게 가실 줄은 상상도 못했다”라고 밝혔다(오른쪽 인터뷰 기사 참조).

고인의 사촌 형은 본인 SNS에 이렇게 썼다. “유난히 힘이 세고 폐활량이 좋았던 동생이 찾은 직업은 ‘잠수사’였습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쉽진 않네?” 하면서 별말 없이 씩 웃던 녀석이었습니다. (중략) 눈 딱 감고 모른 척했으면 관홍이는 오늘도 별일 없이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관홍이와 그 팀원들은 ‘못난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그 우직하고 단순한 성격 때문에 차가운 물속에 아이들 남겨둔 유가족들을 외면하지 못했고, 결국 다시 세월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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