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라 그냥 반팔에 약간 찢어진 스키니 진을 입고 (예배당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저더러 옷 좀 점잖게 입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입으면 형제들이 어떻게 시험을 이기느냐면서, 성폭행은 그렇게 일어나는 거라고….”
이게 무슨 ‘고조선’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사례를 읽는 내겐 너무 익숙한 이야기라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비롯한 ‘자매님들’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여성에게 그리 호락호락한 공간이 아니다. 가부장·남성·목회자 중심의 교회 구조는 일관되고 끈질기게 여성을 남성보다 악하고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가르쳐왔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린도전서 14장 34절)”라는 성경 구절은 여성을 제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발언권을 막는 근거로 왜곡되곤 한다. 여성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지만 주요 의사 결정을 하는 자리에는 초대받지 못한다. 남성 목회자들이 모여 ‘한국 교회의 미래’를 결정할 때 그 바깥에서 여성들은 한복을 입고 안내하거나 음식을 준비한다. 자매님들에게는 순결과 순종을 강조하며 억압하지만, 목회자나 ‘형제님들’에게는 관대하다. 성추행·성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남자들을 시험에 들게 한 짧은 치마나 달라붙는 바지를 입은 여성을 탓할 뿐 가해자의 죄를 묻지 않는다. ‘전도에 방해가 된다’거나 ‘공동체에 덕이 안 된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당하는 쪽은 피해자들이다.
그 견고한 틈을 비집고 질문이 솟아올랐다. “하나님은 차별과 혐오에 침묵하시는 분일까?” 그럴 리 없겠지만, 교회에 갇힌 하나님은 어쩐지 ‘가부장 남성의 하나님’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나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주류 교회에 뿌리박지는 못했지만 “자주적 인간”으로 살기 위해 고민하며 문제 제기를 해온 ‘언니들’이 있었다. 그 흐름을 이어받아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질문하는 자매님들이 어느새 많아졌다. 어느 기독교 단체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한 토론회도 열었다. 행사 이름이 심지어 ‘갓페미’다.
질문은 이어진다. “하나님은 페미니스트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SNS상에서는 ‘믿는 페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차별과 혐오다”라고 말하고 연대하는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아직은 더디고 미약하다. 그러나 함께 고민하고 질문하며 새로운 언어로 신앙을 재해석하려는 노력은 이미 시작되었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진리를 지킨다는 구실로 문을 잠글수록 그 틈새로 질문의 싹은 고개를 들고 저항의 열매는 영글 것이다.
“하나님은 차별과 혐오에 침묵하시는 분일까?”
요즘 여기저기서 “교회에 사람이 줄어든다”라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기독교 인구는 증가했다지만 20~30대는 교회를 탈출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 이유를 몰라 당황하지만 우리는 안다. 남아 있어서 행복하지 않고, 참고 노력한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타인을 서로 존중하지 않는 곳은 이제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 앞의 설문조사에서 한 응답자는 이렇게 일갈했다. “여성혐오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는 제대로 서기 어렵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여성혐오 발언을 한 교회는 하나님이 차별하고 혐오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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