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양한모

아버지가 10대 딸과 친구에게 약물 마취 후 성추행을 했다. 한 트릭아트센터에서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 속 여성 치마를 들춰 보는 전시물을 설치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여성 유튜버를 살해하겠다며 과정을 생중계한 남성 유튜버에게 범칙금 5만원이 부과됐다. 비정규직 여직원을 성추행한 은행 간부가 해외 지점장으로 복귀했다. 여학생을 집단 성희롱한 인하대 의대생들의 징계처분 효력정지 가처분이 인용됐다. 여성의 휴대전화를 빼앗고 51시간 동안 감금한 남성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남자 기자들이 ‘성희롱 단톡방’을 만들어 동료 여기자들을 품평했다(73쪽 기사 참조). 

이게 모두 지난 나흘 동안 일어난 일이다. 알려진 게 이 정도다. 맨정신으로 아카이빙하기 힘들다. 이 중에서도 8월10일, 여성의 신상을 털어 살인을 예고하고 그 여성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생중계한 남성 유튜버 사건을 접했을 때는 잠시 숨쉬기가 어려웠다. “형사과로 넘기기에는 사안이 경미하다고 판단했다”라는 공권력은 특정 성별의 목숨만 지키는 권력인 걸까. 수많은 여성 대상 폭력 사건이 공권력의 초기 대응에 따라 죽고 사는 결과로 갈린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번 대응이 던지는 메시지는 상징적이다. 꼭 1년 전부터 지금까지 받았던 여러 항의 전화와 메일과 댓글이 동시에 주르륵 떠올랐다. 남성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다. 나는 이번 일로 내 목숨 값을 정확히 알게 됐다.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상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기준선이 자꾸만 낮아진다.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가 인터뷰 당시 한 말을 기억한다.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건 사회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자라나는 주변의 아이들을 보면 혼자 다짐하게 된다. ‘네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좋아지도록 어른인 내가 노력해볼게.’

무섭고 지겹고 절망스러워도 목소리 내기를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지금 여기서 여자이기보다는 사람으로 잘 살기를 바란다. 내 뒤에 오는 여자들이 나보다는 조금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나처럼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감각하기보다 안전함을 당연시하며 살아가길 원한다. 그런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게 ‘어른의 일’이라고 믿는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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