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건 대부분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리베카 솔닛이 쓴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이 구절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생각했다. 당신이 한 일은 없고 당신에게 일어난 일만 가득했던 내 엄마의 넋두리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생각했다. 세상 엄마들은 다 그런 거야?
“어떤 어머니에게, 내 어머니에게 딸은 나눗셈이지만, 아들은 곱셈이다. 딸은 어머니를 줄어들게 하고 쪼개고 무언가를 떼어가지만, 아들은 뭔가 덧붙여주고 늘려주는 존재인 것이다.” 같은 책에서 이 구절을 발견했을 때, 나는 또 책을 덮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던 나와 달리 서운한 마음이 더 커 보인 누나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세상 딸들은 다 그런 거야?
정말 다 그런가 봐, 라고 속단하며 정신없이 빠져든 영화 〈레이디 버드〉는, 끝난 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영화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그런데 있잖아, 또 다 그런 건 아닌가 봐. 우리 집과 뭔가 되게 비슷하면서 뭔가 안 비슷해. 나 고3 때랑 당연히 많이 다른데 가만 보면 많이 다르지도 않아. 내가 남자라서 다는 모를 줄 알았거든? 하지만 내가 남자인데도 이건 마치 내 얘기 같아.
내가 느낀 바로 그 이상한 기분, 내 얘기 같지 않으면서 결국엔 모든 게 내 얘기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끝에 이르러서야 밀려드는 이 기묘하고 벅찬 감정을,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화가 꼭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재미있고 신나다가 어느 순간 그 심연에 있는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에 이미 관객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바다 깊숙한 곳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재미있고 신나는’ 오프닝 시퀀스. 운전대를 잡은 건 엄마 매리온(로리 멧칼프). 오디오 북 〈분노의 포도〉를 틀어놓은 채로 차를 몰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딸 크리스틴(세어셔 로넌)이 엄마와 함께 눈물을 쏟아낸다. 좋아하는 소설 취향까지 쏙 빼닮은 딸. 하지만 이어지는 모녀의 대화는 독설로 가득하다. 참다 못한 딸이 달리는 차 문 열고 뛰어내리면서 끝나는 이 장면.
벚꽃보다 예쁜 러브스토리
그때 나는 웃었다. 정말 웃기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면허를 따고 처음 운전대를 잡은 딸이, 엄마와 함께 달리던 길을 혼자 달릴 때. 엄마는 엄마대로, 딸이 없어 조수석이 텅 빈 차를 몰고 혼자 그 길을 다시 달릴 때. 같은 길을 둘이 따로 달리는 영화 후반부 장면에서 나는, 같은 길을 둘이 함께 달리던 첫 장면이 떠올라 울었다. 그들의 마음을 다는 모르면서도, 또 그들의 마음을 왠지 알 것만 같아 눈물이 흘렀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에 빠져 있는 나를 그때 발견했다.
〈레이디 버드〉는 코미디 영화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레이디 버드〉는 성장영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감독 말처럼 이 영화는 무엇보다 “엄마와 딸의 러브스토리”이다. “안타까울 만큼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두 여인이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그 사랑을 이루는” 격정 로맨스. 솔직히 지금 내겐, 벚꽃보다 이 영화가 더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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