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전장〉이 상영되는 2시간 동안 극장은 헛웃음과 탄식이 이어졌다. “한국은 시끄럽게 구는, 버릇없는 꼬마처럼 귀여운 나라다(가세 히데아키, 일본회의 대표위원)” “국가는 사죄해서는 안 된다(후지오카 노부카쓰,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대표)” “그들은 성노예가 아니었다. 매춘부였다(켄트 길버트,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 8명의 발언이 스크린을 통해 가감 없이 전달됐다. 〈주전장〉은 극우주의를 표방한 영화는 아니다. 일본계 미국인인 감독을 중립적인 제3자라고 생각했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이 카메라 앞에서 이례적으로 입을 연 것이다. 지금까지 제작된 일본군 ‘위안부’ 소재 영화와는 다른 지점이다.
미키 데자키 감독(36)은 3년간 한국·미국·일본을 넘나들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연구가·정치인·활동가 3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왜 이토록 역사를 부정하려 하는가.’ 의대생, 승려, 유튜버, 교사 등의 이력을 가진 감독이 던진 질문의 끝에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극우 민족주의자와 아베 정권이 서 있다. 인터뷰를 했던 보수 논객들은 ‘감독이 속였다’며 지난 5월 말 상영 중지를 위한 소송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엄포는 오히려 홍보 효과를 냈다. 일본에서 소규모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5만명을 넘어섰다. 최근 일본 정부의 무역 보복 조치로 인해 한국에서도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일본 영화가 아니니 보이콧하지 말아주세요.” 7월17일 미키 데자키 감독을 만났다.
일본의 수출통제 조치로 인해 의도치 않게 시의성 있는 영화가 되었다.
아베 총리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만드는 3년 동안 ‘개봉됐을 때 이 이슈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 나라 관계가 좋아지거나 과거사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한국 개봉을 앞둔 시점에 아베 정부가 한국에 무역 보복 조치를 내렸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이렇게 대응하는 것은 굉장히 유감스럽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모두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닌 인권 문제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내에서 아베 총리의 영향력이 막강해 아베 정부가 한국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인식이 큰 것 같다. 일본 언론도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오히려 반한 감정을 조장하고 있다.
영화 초반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의 주장이 나온다. 진실 공방 같은 인상을 주었는데?
기획할 때부터 양쪽 의견을 모두 듣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일본에서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역사학계 내에서 주류다. 치우친 의견만 듣다 보니 일본 시민들도 ‘위안부’ 문제에 피로감이 커져갔다. 일본 관객들에게는 특히 양쪽의 입장을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각자가 주장하는 논거를 교차 편집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진행 중인 양측의 논의들을 하나의 싸움터처럼 보여주려 했다. 영화를 통해 몰랐던 관점을 알게 되면 서로에 대한 증오심이 줄어들고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의 증언까지 이 역사 논쟁에 섞여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들의 목소리는 주 전장(戰場)에서 조금 떨어져 전달되기를 바랐다(영화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발하는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으로 시작해 1991년 공개 회견을 통해 피해를 처음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발언으로 끝이 난다).
‘위안부’ 문제가 극우 민족주의의 ‘주 전장’이라고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있나?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 신문〉 기자(현 〈슈칸긴요비〉 발행인)가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1991년 ‘일본군 위안부’라고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를 처음 보도했던 인물이다. 극우 세력은 그를 매국노라 비난하면서 기사를 내리지 않으면 그의 가족을 자살할 때까지 몰아붙이겠다며 위협했다. 그걸 보면서 내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2013년 당시 일본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던 감독은 유튜브에 ‘일본에서의 인종주의와 차별’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이후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에 시달렸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가 받은 협박은 내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그때 ‘위안부’ 문제가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뭔가를 건드렸구나 하고 깨달았다. 왜 그들이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주전장〉이 일본에서 많은 반발을 사고 있다고 들었다.
2013년 유튜브 영상을 올렸을 때만큼 노골적인 위협을 받고 있지는 않다. 그들도 영리해져서 강하게 반발하면 반대작용으로 오히려 영화가 더 유명해질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대신 영화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다. 감독이 학술 연구를 위한 것이라며 자기들을 속여 출연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에 참여했던 보수 논객 켄트 길버트 변호사는 예고편이 나오자 자기 페이스북에 올려 직접 홍보를 하기도 했다. 극우 유튜버 ‘텍사스 대디’의 매니저 후지키 슌이치 씨도 개봉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 정부에게 돈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도 함께 받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뿌듯하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은 제작비로 만든 영화가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니까.
일본의 극우 세력이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극우 민족주의자와 역사 수정주의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건 일본의 순수성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견해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일본은 언제나 옳고 우월하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 감히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고 본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믿음은 다른 나라를 깎아내리고 역사를 부정하도록 만들었다. 아베 정권과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해온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를 본 일본 시민들 반응은 어떤가?
다들 놀라워했다. 일본에서 가르쳤던 학생 중 몇몇은 영화가 너무 충격적이라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더라. ‘위안부’ 이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는데 아베 정권이 이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됐다고. 사실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르거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역사 교과서 개정으로 2012년부터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내용이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7월21일 참의원 선거 전에 꼭 이 영화를 봐야 한다거나 젊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후기가 많이 올라오고 있다.
30여 명이 넘는 사람을 인터뷰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인가?
모든 인터뷰이들이 기억에 남았다. 아마 영화를 본 관객들도 견해에 따라 인물들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태평양전쟁에 참여했던 일본군 병사인 마쓰모토 마사요시 씨가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직접 겪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학자나 정치인들은 읽거나 들은 것에 기반해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관객들은 일종의 재판극처럼 누구 말이 진실인지 혼란을 겪게 된다. 마쓰모토 씨는 직접 ‘위안부’ 피해자들의 숙소를 보았고, 전쟁 당시 일본이 어땠는지 가장 가까이서 확인했던 증인이다. 그분의 성찰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게 영화 구성상으로도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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