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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2009년 07월 06일(월) 제95호
런던·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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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잭슨은 록의 시대에서 팝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으며, 음악을 ‘듣는 매체’에서 ‘보는 매체’로 전환시켰다.

“Michael Jackson is Dead!!!!” 영국 시간 6월25일 늦은 밤의 글래스턴버리 페스티벌 캠핑 존, 어둠과 침묵을 뚫고 어느 텐트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취침 준비를 하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텐트 밖에서 밤하늘을 보던 나에게, 옆 텐트의 스코틀랜드 청년이 말했다. “이봐, 들었어? 마이클 잭슨이 심장마비로….” 여기저기에서 “오 마이 갓!” “언빌리버블(unbelievable)”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프레스 존의 페스티벌 브리핑 난에는 ‘R.I.P(Rest in Peace) Michael Jackson’이라는 문구가 쓰였고, 페스티벌 기간 내내 수도 없이 늘어선 댄스 텐트에서는 ‘스릴러(Thriller)’ ‘비트잇(Beat It)’ ‘배드(Bad)’ 등 그의 대표 히트곡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훨씬 지난 지금도 런던의 타블로이드 신문은 앞다퉈 잭슨의 사망 관련 소식을 1면 헤드라인으로 걸고 독자를 유혹한다. 그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스릴러>가 상연되는 소호의 리릭 시어터 앞은 팬들이 남긴 꽃다발과 메시지로 뒤덮인 상태다.

   
 
마이클 잭슨을 빼놓고 1980년대를 이야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1982년 앨범 <스릴러>는 인류가 1970년대와 안녕을 고하고 1980년대를 맞이했다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음악 신동이라는 별명을 얻은 ‘잭슨 5’ 시절을 거쳐 1979년의 첫 솔로 앨범 <오프 더 월(Off The Wall)>로 이미 충분한 성공을 거둔 마이클 잭슨에게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모든 것을 초월한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제의했다. 퀸시 존스는 그에게 흑과 백을 넘어선 음악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고, 또한 마이클 잭슨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봤다. 잭슨 또한 퀸시 존스의 제안에 기꺼이 응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말했다. “모든 트랙이 각각 히트 앨범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스릴러>는 그의 바람을 이뤘다. 싱글 커트된 트랙 대부분이 차트 정상에 올랐으며, 라디오에서는 앞다퉈 싱글로 발매되지 않은 곡까지 틀었다. 흑인의 그루브감과 백인의 멜로디감을 모두 갖춘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는 록과 R&B, 디스코와 스탠더드 발라드 어디에나 잘 어울렸다.

아이의 순진함과 플레이보이의 에로티시즘

‘비트잇’의 그 유명한 기타 연주를 담당한 에드워드 반 헤일런을 비롯한 당대 최고 연주자들은 퀸시 존스의 지휘 아래 이 앨범의 사운드를 혁신적으로 상승케 했다. 모든 곡, 아니 모든 소절이 자극적인 사운드와 감각적인 비트로 가득 차 있었다. 물 흐르듯 유려했으며 자로 잰 듯 절도가 넘쳤다. 아이의 순진함과 플레이보이의 에로티시즘이 양립했다. 앨범은 1년 가까이 빌보드 정상을 지켰다. 침체일로를 걷던 음반 산업은 이 앨범 한 장으로 단숨에 부활했으며, 1970년대의 음악 신동은 1980년대 팝의 제위에 올랐다. 흑인에게 보수적이던 그래미조차 1984년, 그에게 트로피 8개를 안기며 무릎을 꿇었다.

<스릴러>의 성공을 견인한 것은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앨범이 발매되기 전, 마이클 잭슨은 모타운 레이블 창립 25주년 공연에 참석했다. 잭슨 5 시절과 <오프 더 월> 시절의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최 측의 요구에 그는 신곡을 부르겠다고 했다. 공연 당일, 유럽의 황제를 연상케 하는 어깨 술이 달린, 붉게 번쩍이는 의상을 입고 등장한 마이클 잭슨은 이날 ‘빌리진(Billy Jean)’을 부르며 문워킹을 선보였다. 그가 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문워킹을 춘 시간은 10초가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10초는 1980년대의 첫 번째 비주얼 쇼크가 됐다.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육체를 구현한 듯한 이 춤은 텔레비전를 타고 세계 각국으로 퍼졌다.

마이클 잭슨은 음악을 ‘듣는 매체’에서 ‘보는 매체’로 전환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MTV가 처음 개국했을 때 뮤직 비디오는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음악을 듣기 위해 MTV를 틀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좀비들과 함께 춤을 추는 ‘스릴러’를 10분이 훌쩍 넘는 단편 영화로 제작해 뮤직 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 이 비디오에 들어간 제작비가 사상 최대라는 기록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충격의 영상 앞에서 마이클 잭슨이 흑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로 1980년대와 1970년대에 명확한 선을 그으며 록의 시대에서 팝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경계선마저 무너뜨렸던 셈이다.

그 이후 그가 내놓은 앨범은 단 석 장뿐이다. 1987년 <배드(Bad)>, 1991년 <데인저러스(Dangerous)> 그리고 2001년의 <인빈서블(Invincible)>로 이어지는 하향의 역사. 그의 이름은 음악보다는 온갖 가십 난에 더 자주 보였다. 오랜 시간 그를 괴롭힌 아동 성추행 소송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면서 그의 재정도 바닥으로 향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는 수없이 많은 그의 추종자를 낳았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제2의 마이클 잭슨을 꿈꾸며 데뷔했다.

마음만 먹으면, 즉 활동을 재개하기만 하면 매년 5억 달러 이상을 벌 수 있던 그는 10년 만에 컴백 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 선언이 현실이 되기 직전, 그의 심장이 멈춰버렸다. 주치의들에 의하면 그의 건강은 무대에 오른다 한들 30분 이상 공연하기 힘들 만큼 나빠진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그가 꿈꿨던, 화양연화의 재림은 개봉 직전 미완성의 역사로 남게 됐다. 생전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로 기네스북에 오른 그의 이름은, 이제 음악의 판테온에 올랐다. 돌아올 수 없는 이들만이 오를 수 있는, 만신전의 명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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