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익대 앞 어느 일식집에서 일본인과 마주앉아 일본 술을 마시다가 이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의 언론은 일본에서 삼겹살·비빔밥·막걸리가 잘 팔리는 것을 두고 ‘한류 열풍’이라고 보도한다. 여기 홍대 앞을 보면 알겠지만 온통 일본 음식점이다. 이를 두고 일본 언론이 일본인들에게 ‘일류 열풍’이라는 보도를 한 적이 있는가.” 그는 곰곰 생각하더니, 그런 보도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만약 일본에서 ‘한국에 일류 열풍이 분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면 한국에서는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

최근 어느 방송사에서 삼일절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한국 음식의 변화에 대해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참 의미 있는 프로그램일 것인데,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음식 문화를 이루는 근간은 농수축산업이고, 한국 농수축산업의 기본 골격이 일제에 의해 마련되었다는 것을 먼저 솔직하게 밝히는 게 그 방송의 순서일 것인데, 방송의 특성상 그 긴 이야기의 핵심만 추려 내보낼 것이 분명하여 자칫하면 내가 식민지근대화론자 또는 친일분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사IN 자료압구정동, 홍대 앞, 이태원 등에는 한글만 없으면 일본의 어느 거리라 해도 될 만큼 일본 음식점이 많다.

〈식객2: 김치전쟁〉 개봉 당시의 해프닝

서울의 일본 음식에 대해 쓰는 글인데, 그 앞에 세설이 긴 까닭은 한국의 쇼비니즘(광신적 애국주의)이 두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쇼비니즘은 일부 특정한 집단의 문제가 아니다. 온 국민이 일시에 쇼비니즘 광풍에 휩싸이는 것을 종종 목격하는데, 특히 일본과 관련되는 것이면 그 맹목성 앞에 모든 반대 논리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꿇지 않으면 사회적 매장이 보복으로 따른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세설을 확장하자. 2년 전 딱 이맘때 〈식객2: 김치전쟁〉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제작진은 일본 〈산케이 신문〉에 전면 광고를 냈다. 광고에는 크게 ‘KIM-CHI’라고 쓰여 있었다. ‘기무치’라고 하는 일본인들에게 ‘김-치’라고 바른 이름을 가르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언론과 국민은 이 광고에 환호했다. 한국의 김치를 가져가 너희 마음대로 조리법 바꾸고 이름도 바꾸어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저 영문의 KIM-CHI도 기무치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받침 있는 글자를 일본인들은 잘 읽지 못한다. 그네들 처지에서는 기무치라고 왜곡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소리가 날 뿐이니 그리 부르는 것이다. 


ⓒ황교익 제공홍대 앞의 어느 꼬치집. 왼쪽의 남자는 일본 출판기획자 야마시타 씨이다. 그는 “한국 꼬치가 비싸다”라고 했다. 홍대 앞이고 ‘일본 전통’을 주장하려니 비싸졌을 것이다.
무서운 것은, 이 사실을 한국인도 잘 알면서 저 KIM-CHI 광고에 환호했다는 점이다. 이 광고에 딴죽을 거는 일이 반민족적이고 친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이 대한민국의 분위기는, 정말 무서운 일이다. 참고로, 이 KIM-CHI 광고가 나오기 딱 2년 전에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는데,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인 이경숙씨가 ‘Orange’는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말해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쇼비니즘 앞에서는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가 멈춰버리는 것이다.

2012년 현재 서울 음식은 ‘일류’가 대세이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압구정동, 가로수길, 홍대 앞, 이태원 등에는 일본에서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음식이 있다. 서울의 백화점 음식 매장은 더 심하다. 일본 백화점 음식 매장과 디자인 콘셉트까지 똑같다. 백화점의 로고만 떼면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이 일류의 범람에 한국의 쇼비니즘은 발동되지 않는다. 참 묘한 일인데, 이게 또 한국이다.

1920년대에 일본인 15만명 경성에 거주

서울이 조선의 한성이었을 때 사대문 안에 20만명 정도 살았다. 일제강점기 들어 성곽이 헐리고 경성이 확장되었다. 1945년 광복 무렵의 인구는 100만명 정도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에 경성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았다. 1920년대에서 광복 무렵까지 평균 15만명 정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경성에 주거지를 둔 인구인데, 여러 일로 일시적으로 머문 일본인까지 포함하면 당시 경성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일본인이 있었을 것이다. 일제는 애초 총독부를 남산 중턱에 두었다. 따라서 그 아래의 지역에 일본인 거주지가 섰다. 지금의 을지로·명동·충무로·장충동 일대이다.

용산은 그 이전에 일찌감치 일본인이 진을 쳤다. 이름도 그들식으로 바꾸었는데, 충무로 진고개의 혼마치, 을지로 인근의 고가네쵸가 중심 상권이 되었다. 유곽도 섰다. 1930년대에는 조지야, 미쓰코시, 미나카이, 히라다 등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었다. 작은 일본이었다.

일본인이 집단으로 살았으니 일본 음식도 넘쳤다. 혼마치에는 골목골목 고급 요정에서 대중음식점, 선술집 등이 다양하게 들어섰다. 그러나 이는 광복과 더불어 사라졌다. 15만 일본인이 자리를 떴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적산 가게 일부를 한국인이 인수했다 해도 그 음식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또, 한국전쟁은 이 가게들마저 파괴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음식의 흔적은 말로만 남았다. 1971년 〈경향신문〉의 기사이다. 


ⓒ황교익 제공서울 한 기사식당의 돈가스이다. 일본 음식이 한국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제육튀김’이라는 한국 말로 바꾸지는 않았다.
“요즘 명동엔 밀가루 음식을 파는 분식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호떡집이나 분식센터를 빼고도 일식, 중국식, 양식집 등 70여 개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일정 때 명동 거리에 음식점이 제한되어 있어 어느 집에 가면 무슨 요리가 좋다는 식으로 손꼽았고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때와는 격세지감이 있는 셈. 30년 전만 해도 명동에서 손꼽히는 것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의 식당. 명동에 양식집 간판을 내건 것인 청목당. 7월 복더위에는 에도가와의 뱀장어구이를 즐겨 사먹었고 이보쭈라는 일본 식당의 오뎅도 장안 명물이었다나.” 아마도 이 글을 쓴 기자는 일제강점기의 일본 음식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일본 음식이 일본인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이 땅에 남아 토착화를 시도했다. 한반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조건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해방된 땅이니 식민 지배의 흔적을 지워야 할 것이었다. 우동은 가락국수, 덴뿌라는 튀김, 소바는 메밀국수, 사시미는 생선회, 오뎅은 꼬치, 야키메시는 볶음밥, 다꾸앙은 단무지, 돈부리는 덮밥, 스시는 초밥, 돈가스는 제육튀김, 스키야키는 왜전골 등등으로 ‘창씨개명’을 시도해 일부는 바꾸었고 또 일부는 그 이름 그대로 현재도 쓰고 있다.

1970년대 강남 개발로 서울 졸부들이 탄생했다. 1980년대에 들자 이 졸부들에 의해 고급 일식 붐이 일었다. 초호화판 인테리어를 한 강남의 일식집에서 ‘사시미 코스’를 내놓았다. 일본에서 요리사를 초빙하기도 했다. 음식 가격은 매우 비쌌고, 따라서 졸부 남자 어른이 주요 고객이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강남 졸부의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 외국으로 놀러 나갔다. 아직 멀리는 가지 못하고 일본을 들락거렸다. 1992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패션이 도쿄 한복판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일본을 들락거리던 강남의 아이들이 알았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일본의 유행을 따라 했다. 그해에 압구정동의 한 식당에는 쇼군(將軍)을 그린 일본 민속화 간판이 올라갔다. 현대화한 도쿄식 이자카야가 등장한 것이다.


남대문 냄비우동과 강남 일식집의 사누키우동

1990년대 이후 서울의 일본 음식은 두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웬만큼 한국화한 일본 음식과, 최근 일본에서 직수입한 일본 음식. 한국화한 일본 음식은 가난한 한반도에서 버티느라 싸구려에 촌스럽게 변했으며, 직수입한 일본 음식은 세계 으뜸의 경제대국을 이룬 국가에 걸맞게 비싸고 샤방샤방했다. 비교하자면, 남대문시장의 냄비우동과 강남 프랜차이즈 일식집의 사누키우동, 피맛골 참새집 꼬치와 홍대 앞 일본 유학생 출신 요리사의 꼬치, 성북동 기사식당 돈가스와 일본에 로열티를 지급하는 돈가스같이 말이다.

일본 음식은 이제 거칠 것 없이 젊은이의 거리를 파고들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혼마치가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직접적 기억이 없으니 일본 음식에 대한 심리적 장벽 같은 것은 없다. 가끔 정치권력이나 상업자본에 의해 조작되는 쇼비니즘이 일본을 향해 주먹으로 ‘엿’을 먹여보지만, 이는 정치의 일이고, 내 코앞의 두툼한 안심 돈가스는 맛있기만 한 것이다. 구보 씨는 이제 남촌으로 걸어도 될 것이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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