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민주통합당(민주당) 후보는 졌다. 초박빙이 예상됐지만, 108만496표 차이로 결과는 싱거웠다.

제3후보 변수 없이, 범보수와 범진보 진영이 양쪽의 자원을 박박 긁어모아 치러낸 선거였던 만큼 후유증은 오래갈 수밖에 없다. 민주당 내부에서 자성하듯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를 진 죄로, 야권은 내홍에 휩싸여 있다.

무엇보다 당 내부 수습도 문제지만 외부의 여진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온라인 서명자 수가 20만명을 훌쩍 넘었다. 더욱이 이들은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로, 유엔 트위터 계정으로 ‘선거 개입’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민주당 관계자와 선관위의 설명을 종합해 이들이 주장하는 의혹을 살펴보자. 먼저, 재검표 요구가 격발된 건 로지스틱함수 그래프 논란이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 “매끈한 곡선으로 보이는 게 당연” ). 다음으로 많은 의혹을 산 수치는 이른바 ‘0.93%’.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의 득표 비율 차이가 투표일 밤 10시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5시20분까지 0.93%로 소수점 이하 둘째 자리까지 같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득표 비율을 소수점 7자리까지 넓혀보면, 미세하지만 계속 바뀐다. 한 번도 문 후보가 뒤집지 못한 채 자정 이후 개표가 90% 진행된 상황에서 후보 간 득표비율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 역시,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전자 개표 논란은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단골손님이다. 논란을 줄이기 위해 무엇보다 명칭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흔히 전자 개표기라 불리는 기계의 정식 명칭은 ‘투표지 분류기’다. 후보자별로 표를 분류하는 보조 장치일 뿐이다. 선관위는 이 기계가 일괄 조작이 가능하도록 세팅된 네트워크 장비가 아니기 때문에 조작이나 해킹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 기계의 사용 근거는 공직선거법 제178조 4항과 공직선거관리규칙 제99조 3항이고, 헌법재판소(2005헌마982)와 대법원(2003수26)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분류된 투표지는 선거법에 의해 ‘수작업 개표과정’을 거쳐 최종 확정된다. 즉, 개표 관리원이 투표용지를 정리해 투표지 분류기에 넣고, 투표지 분류기는 후보별로 100장 단위로 분류해 묶는다. 이후 심사집계부가 후보별 분류가 정확히 되었는지를 계수기를 통해 확인하고, 선관위 위원들은 후보자별 득표수를 다시 검열한다. 물론 이 과정은 모두 각 당에서 파견된 참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다.

온라인에 올라온 개표 조작 증거 영상 역시, 실제 개표 상황이 아닌 참관인들에게 투표지 분류기 세팅을 설명하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해명됐다. 선관위가 재검표를 하지 못하도록 투표용지 소각을 서두르고 있다는 의혹 역시, 관계자들은 사실관계가 다르다고 해명한다. 개표가 끝난 투표용지는 봉인해 최소 한 달(선거 혹은 당선 무효소송을 대비한 법적 시한), 통상적으로 2~3개월 보관된다.

또한 서울시의 경우 대통령 선거 투표자 수와 교육감 선거 투표자 수가 다른 것으로 나타나 의혹을 샀다. 그러나 재외국민이 보궐선거 투표권이 없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100장 단위로 표를 묶는데도 개표 방송 당시 충북 단양(박 후보 29표-문 후보 31표)과 강원 횡성(박 후보 27표-문 후보 42표)에서 두 자릿수의 득표가 보도됐던 것은, 재외선거 투표함을 별도 개표했기 때문으로 해명됐다.

이렇게 부풀려진 개표 부정 논란의 끝은, 이미 한 차례 결론이 난 바 있다. 정확히 10년 전이다. 선거 무효소송을 낸 원고는 한나라당, 피고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였다. 2003년 1월27일 전국 244개 개표소 가운데 40%인 80여 곳에서 대법원 책임 아래 헌정 사상 초유의 대규모 재검표(1104만9311표)가 이뤄졌다. 사실상 개표작업을 새로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회창 후보의 표는 88표 늘었고, 노무현 후보의 표는 816표가 줄었다. 결과적으로 0.00008%의 차이로 선거 당락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재검표를 통해 지지자들은 ‘힐링’했지만, 당은 여론의 힐난을 피할 수 없게 된 채 격랑에 휩싸였다. 결국 소를 취하한 한나라당이 부담한 소송비용은 5억여 원에 달했고, 재검표에 동원된 인원은 3000여 명에 가까웠다.

민주당 “전화 때문에 업무를 볼 수 없는 지경”

당시에도 진원지는 인터넷이었다. 선거 직후 한 온라인 게시판에 국정원에서 17년간 근무한 중견간부라고 자신을 밝힌 이가 개표 조작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올린다. 이후 이회창 후보의 팬클럽인 창사랑과 당원 200여 명은 캠프 해단식을 점거하는 등, 재검표를 요구하며 당을 전방위로 압박한다. 이 후보 지지자들의 항의전화와 시위가 연일 이어지자, 서청원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12월24일 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를 통해 ‘전자 개표 조작설’의 검증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안상수 부정선거방지본부장과 이주영 상황실장이 이 검증 작업을 총괄 지휘했다. 혼표(노 후보의 100장 묶음에 이 후보 표가 여러 장 포함됐다는 의미), 전자 개표기 판독 기능 저하, 득표율이 일정한 패턴을 유지했다는 등의 개표 부정 사례를 언급한다. 지금 쏟아지는 의혹들과 놀랄 만큼 똑같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밝혀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다”라며 즉답을 피했다. 이들이 선거 무효소송을 한 이유 역시 지금과 소송 주체만 다를 뿐 같다. “명쾌하게 밝히는 것이 부정선거 시비에 발목 잡힌 당선자의 원활한 정국운영을 위해서 필요하다”라는 명분이다.

당이 총력을 기울였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났다. 재검표 결과는 허무했고, 서청원 대표는 대국민 사과와 함께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양심선언을 올려 개표 조작설을 유포했던 전직 국정원 간부는 한 특수학교 교사로 밝혀져 긴급 체포됐다. 그는 2003년 4월, 2년4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회창 캠프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였다. DJ와 달리 노무현은 바람이었다. 사기당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당내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검표 주장이 관철된 이유가 나름 있었다.”

2013년 민주당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지난해 12월26일 “국회 차원에서 행정안전위원회(행안위)를 통해 진상조사를 추진하기로 결론 내렸다”라고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개표 부정 문제를 공론화했다. 참여정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지난해 12월30일 〈오마이뉴스〉 기고를 통해 2003년 한나라당 사례를 언급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개표 부정 의혹이 과장됐다고 하더라도, “개표 정의를 요구하라”며 거들고 나섰다. 조 교수는 이 글에서 “망신을 당해 정계 은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지자를 위해 한 번쯤 자신을 불태울 용기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사실상 민주당의 ‘자폭’을 요구한 셈이다.

정작 민주당은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성난 지지자들을 어떻게든 달래야 하는 책임이 있는 당으로서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수개표부터 해야 믿어준다는 식이다. 밀려오는 전화로 일상적인 업무를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의 말이다. 윤관석 원내대변인은 “후보가 결과에 승복했고, 선관위가 법과 원칙에 맞게 공정히 처리할 것이다”라는 원론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민주당을 대신해 누리꾼 모임인 ‘선거소송인단 모임’은 1월4일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당선자의 당선 및 선거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소송의 원고를 자임하며 소송비용을 모금하고 있는 한영수씨(전 선관위 공무원노조 위원장)와 김필원씨(전 안기부 직원) 두 사람은 2002년 제16대 대선 때부터 역대 대선마다 빠짐없이 전자 개표기 조작설을 유포했던 인사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이들이 선거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그 때문에 윤 아무개 목사가 지휘한 SNS 여론조작단과 국정원 직원 선거 개입 등 확실하게 파헤쳐야 할 의혹들이 물타기 되고 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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