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6명의 일상과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기억과 살다(記憶と 生きる)〉를 봤다. 감독은 일본인 남성 도이 도시쿠니(土井敏邦). 그는 1985년부터 30년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역을 취재하고 2009년, 다큐 〈침묵을 깨다〉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한창 팔레스타인을 드나들던 1994년, 도이 감독은 왜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까?

세 사람이 있다. 먼저 인연을 만들어준 도미나가 하쓰코(富永初子, 1914~2002). 도이 감독은 히로시마 대학 시절 원폭 피해자 도미나가 씨를 만났다. 당시 도미나가 씨는 원폭 후유증과 백내장에 시달리면서 평화운동에 매진했다. 도이 감독이 도미나가 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점은 일본인이라는 ‘당사자성’이다. 자신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피폭자이지만 아시아인 시각에서 보면 가해국 일본의 국민, 즉 가해자라는 당사자성 말이다.

ⓒ연합뉴스2015년 6월7일 도쿄에서 도이 도시쿠니 감독(오른쪽)이 만든 <기억과 살다> 상영회가 열렸다.

1980년대 도미나가 씨는 치료차 히로시마에 온 한국인 피폭자 10여 명을 찾아가서 “저는 히로시마의 피폭자이지만,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많은 고통을 드린 점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머리 숙여 사죄했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도이 감독은 1982년 원폭 피해와 식민지 지배라는 이중고를 겪은 한국인 피폭자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 뒤 12년이 흐른 1994년 8월 도이 감독은 다시 한국에 왔다. 이번에는 도미나가 씨를 위해서였다.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도미나가 씨는 도이 감독에게 “꼭 한번 할머니를 찾아뵙고 싶다”라며 동행을 부탁했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도미나가 씨가 한국을 찾기 어렵게 되자 도이 감독은 생존자의 모습과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아 그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당시 서울 혜화동의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를 만난 감독은 큰 충격을 받고, 그해 12월 다시 찾아간다. 이번엔 도미나가 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일본인·남성·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다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997년 1월까지 약 2년간 나눔의 집 건너편에 아예 하숙집을 잡고 대부분의 시간을 나눔의 집에서 보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기억과 살다:1부 나눔의 집〉과 〈기억과 살다:2부 강덕경〉이다.

1994년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니 이 영화는 2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셈이다. 감독도 피해자가 한 사람씩 숨을 거두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백 시간이 넘는 방대한 양의 촬영 테이프, 거의 한국말이었던 인터뷰, 막대한 번역 비용 때문에 그는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감독을 움직인 두 번째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전 시장이다. 2013년 5월13일 오사카 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당시 하시모토 시장은 위안부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왜 일본의 종군위안부 제도만 문제 삼는가. 당시 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베트남 전쟁과 한국전쟁에서도 위안부 제도가 존재했다”라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 일로 나라 안팎에서 맹렬한 비난을 받은 하시모토 전 시장은 사죄했지만, ‘위안부 제도가 필요했다’는 발언은 철회하지 않았다. 도이 감독은 하시모토 전 시장의 발언을 듣고 그가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발언했다고 생각했다.

가해국의 저널리스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시모토 시장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관련 망언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를 얼굴이 보이지 않는 ‘집단’으로만 인식해서다. 도이 감독은 2013년 곧바로 편집에 들어갔고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관객은 도이 감독의 영화를 통해 당사자와 대면하고, 만남을 통해 그녀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인물은 현재 일본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사진작가 안세홍씨다. 2013년 그는 일본 카메라 업체 니콘을 상대로 손해배상과 사죄 광고를 요구하는 재판을 진행 중이었다(2015년 12월25일 도쿄 지방법원 재판부는 안씨에게 110만 엔(약 1066만원)의 배상금 지불 및 니콘 측의 사죄 광고 게시 청구 기각이라는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피해국 한국의 저널리스트가 일본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해국의 저널리스트인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도이 감독의 다큐 속에는 피해자를 보살피는 변영주 영화감독의 모습이 담겨 있다. 변 감독은 도이 감독과 같은 시·공간에서 생존자의 기록 다큐 〈낮은 목소리 1〉을 찍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두 작품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두 작품 모두 카메라와 피사체인 생존자의 거리가 놀라울 정도로 가깝다. 도이 감독의 다큐에는 한 방에서 네 명이 뒹굴거리며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등 생생한 일상이 잘 포착되어 있다.

ⓒ안세홍 제공<기억과 살다>의 포스터. 도이 감독은 1997년부터 약 2년간 아예 ‘나눔의 집’ 건너편에 숙소를 잡고 살며 할머니들을 취재했다.

맨 처음 피해자들은 두 감독을 반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도이 감독은 일본인인 데다 남성인 터라 거부감이 더했다. 하지만 감독과 통역자(히로시마 대학에서 만나 친구가 된 한국인 유학생)가 피해자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밥을 먹고 온돌이 고장나면 나서서 수리도 해 주는 등 서로 조금씩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이들 두 남자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2주일이 지나면서 증언을 촬영할 수 있었다. 피해자들은 “이렇게 와서 이야기해준들 뭐가 바뀌느냐”라고 타박하면서도 “이 사람이라면 내 심정을 일본에 전해주겠다”라고 믿고 감독에게 증언했다. 다큐 2부에 담긴 ‘강덕경’은 1995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1997년 2월까지 투병하던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씨의 말년을 담고 있다. 마치 그녀가 감독을 통해 남긴 유언과도 같다.

그렇게 당사자들과 인연을 맺은 도이 감독은 영화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체험과 ‘진상 규명과 배상,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담았다. 2부 ‘강덕경’에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책임자를 처벌하라’와 ‘그대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도 담겨 있다. 도이 감독의 가족들까지 일본 우익의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1〉에 나눔의 집 피해자들의 위안소 체험기는 없다. 변 감독은 위안소 시절을 질문하지 않은 데 대해 “할머니를 위한 배려 차원이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질문을 하지 못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대신 〈낮은 목소리 1〉은 위안부 피해자의 귀국 후 삶을 전하고 있다. 한국 사회 자체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보여줬다. 이 다큐에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변 감독의 ‘당사자성’이 녹아 있다(변 감독은 이어서 〈낮은 목소리 2〉와 〈숨결〉을 제작했다).

지난해 말 한·일 정부가 피해 당사자는 무시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했다. 도이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한국에서 상영하기 위해 영화관을 물색 중이다. 2016년 한국과 일본의 많은 이가 이 두 감독이 남긴 피해자의 증언을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가 있기를 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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