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이었다. 대학 3학년. 참으로 엄중한 시절이었다. 그해 4월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헌(護憲) 선언’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대학가에도 공포가 만연했다. 당장에라도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또다시 1980년 ‘5월의 봄’의 좌절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난무했다. 6월10일 국민적 대저항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이길 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백주에 구호를 외치며 서울 도심을 누비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졌어도 문득문득 우리들 머릿속엔 ‘이러다가 군대가 다시 일어서는 거 아냐?’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많았다.

싸움은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독재자는 항복 선언을 했고 시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소중한 권리를 되찾았다. 삶이 늘 그렇듯 해피엔딩이란 건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신(神)은 독재자의 ‘절친’을 대통령으로 뽑히게 만들어서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시사IN 조남진3월21일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 조합원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잊고 지냈던 젊은 시절의 아득한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 것은 바로 2012년 MBC 170일 파업 때였다. 이명박 정부 이후 내가 몸담고 있었던 MBC를 비롯하여 YTN·KBS 같은 방송사들이 홍역을 치렀다. 방송을 고스란히 손아귀에 쥐고 싶어 했던 권력자는 무소불위의 인사권을 행사해 위에서부터 차츰차츰 잠식해 들어왔다. 언론의 사명이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고 배웠고 일상에서 실천해오던 우리들은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2012년 대파업이었다. 주변에서는 무모한 싸움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뜻 모를 자신감이랄까, 우리는 이길 것을 확신했다. 우리의 싸움이 정당하기 때문에 시민들도 대대적으로 호응해주리라 믿었다. 결과적으로 장기간 파업을 지속했지만 우리는 패배했다. 비록 많은 시민들이 호응해주었지만 생각만큼 우리의 이슈가 모두의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많은 해직자와 징계자를 양산하며 파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1987년의 교훈을 다시 뼈저리게 되씹었다. ‘해피엔딩이란 게 쉽지만은 않구나’ 하고.

박근혜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4년간 쓰라린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가을부터 기적적인 시간이 우리에게 믿어지지 않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2012년 파업 때도 우리는 촛불을 들며 우리의 작은 촛불이 거대한 시민들의 촛불로 타올라주기를 바랐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우리와 같은 심정으로 촛불을 들고 버텼을 것이다. 권력의 무도한 횡포 속에 신음해온 모든 이들의 마음속 촛불이 광장의 촛불로 승화되어 지금의 이 기적과도 같은 현실을 낳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다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미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 흔치 않은 기회가 왔다. 그 결과가 모두에게 행복할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해피엔딩을 꿈꾸며 투표장에 들어갈 것이다. 30년 전 신은 우리에게 겸허함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우리가 흘린 눈물과 땀, 이제 신도 알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기자명 강지웅 (MBC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