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미술 시간이었다. 교실 앞에는 4절 머메이드지와 색종이, 유성펜이 색상별로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미술 재료들을 필요한 만큼 가져갔다. 자, 붓, 물통 같은 기본 용품은 모둠 바구니에서 꺼내 썼다. 온갖 물건이 섞이고 부딪치며 자근자근 소음을 냈다. 자잘한 웅성거림 속에서 “찰캉!” 하는 금속성 마찰음이 귀를 때렸다.
안경을 쓴 아이가 색연필 보관함을 내려놓으며 실수로 낸 소리였다. 찌릿! 그 아이와 같은 모둠인 친구 두서넛이 따가운 눈총을 주었다. 그것도 잠시, 교실은 이내 만들기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나는 한참이나 햇빛에 반짝이는 양철 색연필 케이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학급에 비치된 공용 학용품이 없었기에, 다들 준비물을 따로 챙겨왔다. 형편에 맞게 알아서 가져가는 준비물은 집집마다 질과 양이 천차만별이었다. 그중 친구의 독일제 색연필은 단연 돋보였다. 전용 보관함에 가지런히 놓인 36색 색연필은 너무나 우아해 보였다.
내가 썼던 12색 색연필은 구식이었다. 심이 닳으면 옆에 붙은 실을 살짝 잡아당기고, 돌돌 말려 있는 종이 몸통을 까서 쓰는 구조였다. 종이 몸통이 한 칸씩만 벗겨지도록 힘 조절을 잘 해야 했는데, 둔한 남자애 손가락은 번번이 두 칸을 잡아당기기 일쑤였다. 무리하게 힘주어 쓰다가 심이 부러지면 툴툴거리기를 반복했다.
반면 독일제 색연필은 일반 연필처럼 연필깎이에 넣고 손잡이 몇 번 돌려주면 끝이었다. 색도 얼마나 곱고 다양하던지 흰색·주황색·노란색·빨간색을 섞어 어렵사리 표현한 은은한 노을빛이 거기엔 단색으로 존재했다. 한번 써보고 싶어도 입은 못 열고, 어깨너머로 훔쳐보기만 했다.
그때 그런 학생이 나뿐이었을까? 아직도 고급 색연필 주변을 서성이던 아이들의 어색한 몸짓을 기억한다. 그나마 12색 색연필이라도 있는 경우는 다행이었다. 툭하면 까먹었다는 핑계를 대며 준비물을 빌리러 다니고, 분실물 상자에 들어 있는 토막 크레파스를 이용하던 친구의 심정은 어땠을까.
학교 앞 문방구 부럽지 않은 학교 안 문방구
요즘은 교육 여건이 좋아져서 학교 예산으로 학습 준비물비가 따로 나온다. 교사들은 학기 시작 전에 교육 계획을 짜고 미리 준비물을 구비해둔다. 가위부터 풀, 컴퍼스 등 정규 교과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의 80%는 갖출 수 있다. 나머지는 리코더, 멜로디언처럼 입을 대는 악기나 특별활동에 들어가는 물품들이다. 몇몇 학교는 전교생이 공유하는 ‘학습준비물 센터’를 운영한다. 학교 앞 문방구가 부럽지 않은 학교 안 문방구다.
헌법 제31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특히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의무교육은 ‘학비 공짜’만 의미하지 않는다. 적어도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점심이나 준비물 걱정 없이 교실 문을 열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을 받을 권리라는 건 교육받는 데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국가에 교육을 위한 일정한 시설과 환경을 배려해줄 것을 요구하는 적극적 권리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친구가 36색 색연필을 꺼내놓아도 별 감흥 없이 미술 작품에 집중할 수 있고, 쌓여 있는 도화지 더미를 보며 실수한 스케치 하나에 좌절하지 않는 수업 시간은 학생들의 당연한 권리다. 준비물로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게 하는 것. 교육의 변화는 사소한 눈빛의 차이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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