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든 엄마가 연신 아이에게 킥보드 질주를 요구했다. 추석 연휴 어느 날 고즈넉한 숲길에서 겪은 일이다. 대여섯 살 남자아이들이 나무 데크 보행로를 씽씽 타고 내려오니 소음도 소음이거니와 걱정이 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 아빠는 배경으로 멀리 세워두었다. 한술 더 떠 ‘찍사’ 엄마와 ‘배경’ 아빠는 내 시선을 사뭇 의식하는 듯했다. ‘여보세요, 부럽거나 예뻐서가 아니라 걱정되고 심란해서랍니다.’
이 가족에게는 숲길의 조용함도 나들이의 즐거움도 뒷전으로 보였다. 잘 세팅된 공간에서 잘 찍은 사진을 남기는 게 중요할 뿐, 스튜디오든 자연에서든 차이가 없다. 쇼윈도 육아. 보이는 게 중요하니까.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영역에서까지 타인의 시선에 매여 산다. 원래 눈칫밥 먹는 사회구조이고 분위기라지만, 양육과 교육에서는 더 그런 경향이 있다. 맵시 빠질까 봐 이른 아침 ‘녹색어머니’를 하러 가면서도 꽃단장을 하고, 아이가 공부 못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학원 레벨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편법을 쓴다(못하니 학원에 가는 거 아닌가). 공부에 뜻이 없는 아이를 재수, 삼수 시키며 어느 대학에 지원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주객이 전도되는 일을 벌이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떼쓰는 아이를 훈육한다며 아이보다 더 큰 소리로 혼을 낸다. 주변 사람들, 더 시끄러워 괴롭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를 몸살이니 급체니 다른 핑계를 대며 조퇴시키고 결석시키면서 혹여 소문날까 담임교사에게도 감춘다. 교사의 영향력과 책임에 대해 무지한 것이며 나아가 위험한 처신이다. 아이 행동이 이상하면 뒷말이 나게 마련이다. 쉬쉬하느니 교사에게 정확히 알려서 배려받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내 새끼가 아픈데 남의 눈치 살피는 것처럼 바보짓이 없다. 교사는 아이가 양육자 외에 유일하게 기댈 만한 어른이다.
이런 ‘보여주기식 양육’은 지금의 학부모 세대가 평가에 너무 휘둘리며 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개인적 특성보다는 세대적 특성이 도드라진다. 학력고사 이후 세대, 외고·과학고 입시를 겪은 세대에 속한 양육자일수록 타인의 시선에 더 민감하다. 성장기부터 극심한 경쟁에 노출된 채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존중받은 경험이 많지 않아서가 아닐지 조심스레 진단해본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세다’는 속설처럼 말이다.
눈치 보고 변명하는 양육자를 보고 자라는 아이
게다가 이런 태도는 대물림된다. 아이가 학교 숙제나 수업 집중 같은 응당 할 일을 게을리할 때 앞장서서 ‘쉴드쳐 주는’ 부모가 적지 않다. 제풀에 그런다. 가령 초등학교 영어 시간에 단어 쓰기 시험을 보면, 수업 안 빠지고 딴청 안 피운 아이라면 대충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다. 난이도가 높지 않은 데다 반복 학습하기 때문이다. 틀려도 누가 뭐라 안 하고 틀리면서 익히면 된다. 그런데 묻지도 않은 결과를 들먹이며 “애가 영어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못 썼다”라는 부모가 있다. 괜한 눈치 보기이자 변명이다. 아이에게는 몹시 ‘나쁜 사인’이다. 나중에 학원을 다녀도 잘 못 쓰면 “강사 실력이 떨어져서 그렇다”라고 하려나. 유독 아이가 처질까 빠질까 전전긍긍하는 부모일수록 교실 분위기 탓, 학교 탓, 동네 탓, 심지어 선생님의 출신 학교를 탓하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그렇게 자란 아이는 나중에 부모 탓을 할 공산이 크다. 멀쩡한 아이를 망치는 길이다. 아이는 양육자의 거울이다. 타인의 시선보다 아이의 시선이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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