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때가 때인 만큼 명절 살풀이다. 먼저 심심한 인사를 전한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연휴가 길었다. 몸도 마음도, 멘탈도 멀리 떠나갔다 돌아온 추석. 여러 사람과 명절 뒷이야기를 나누며 연휴의 끝자락을 속 시원히 보냈다.
올해 처음 며느리·사위 노릇을 일삼은 이와 더는 ‘설거지 귀신’으로 살 수 없다 선언한 이. 연휴를 앞두고 해외로 자취를 감춘 이와 연휴에도 먹고살기 위해 일을 멈추지 못한 이. 명절에 드디어 반려묘와 생이별을 경험한 이와, 임신과 출산에 성공하여 잠 못 드는 이까지. 명절 뒷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뻔하고 다채로웠다.
나는 추석 전날 귀향했다 이틀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고 귀경했다. ‘아들 노릇’은 하나도 하지 않고 부모와 친지에게 작은 걱정거리가 되었다가 홀연히 고향을 떠나왔다. 고향에서 점점 멀어지는 밤 버스에서 휘영청 뜬 보름달을 보았다. 이상한 감흥에 젖었다. 달은 가깝고도 먼 것이었다. 달은 움직이면서도 멈춰 있는 것이었다. 달은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 달은 충만하면서 동시에 공(空)을 향하는 것이었다. 조용히 자식 곁에 와 앉아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말하고 자식의 소소한 일상을 궁금해하던 부모의 쇠락한 얼굴이 겹쳐졌다. 쇠락을 지켜보는 일은 무한히 쓸쓸한 것. 그러나 그 유한한 일을 통해 인간은 겸손을 배운다.
지난 설에 부모에게 겸손히 말씀드렸다. ‘이제 더는 결혼 얘기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도 올 추석에 어김없이 결혼 얘기가 부모에게서 흘러나왔다. 동갑내기 조카가 애인을 데리고 오고, 스물일곱 살 조카가 연상 이성과의 연애를 공개하는 바람에 명절 술자리의 대화가 결혼과 이혼과 재혼으로 점철된 탓이기도 했으나 부모에게 실망했다. 때때로 부모도 자식에게 실망하니 서로 비긴 셈. 가끔은 부모도 ‘부모 노릇’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는 마음에 엄하게 아들의 연애를 못마땅해하는 사촌 누나에게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며, 며느리는 당신의 딸이 결코 될 수 없는 거라고 말해주었으나 다들 ‘결혼도 못 해본 것이~’라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너부터 아들 노릇 하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명절이면 현금을 준비하고 일찍 귀향해 동그랑땡도 노릇하게 부치고 손님 술상도 단정히 차려내고 설거지도 깔끔히 했는데, 며느리를 고용하고 대를 잇는 아이를 생산해야만 충실해지는 아들 노릇, 참 이상한 노릇이다. 결혼만 하면 효자 되는 아들 노릇은 또한 어떻고.
이해할 수 없음으로 시작된 살펴봄
여하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그 부모 노릇과 아들 노릇을 뒤로한 채 버스에 몸을 싣고 부모 마음이란 것을 다시금 헤아려보게 되었다. 이해로부터 시작된 헤아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으로부터 시작된 살펴봄이었다. ‘어쩌다 저리 늙는가.’ 내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점검했다. 처지를 바꿔보는 일로 해결될 심사가 아니었다. 명절에 그런 심사가 많다. 남편과 아내가, 고부가 처지를 바꿔본다고 해결될 수 없는 심사도 있다. 가부장제와 계급을 둘러싼 것들을 점검하는 일은 처지를 바꿔보는 게 아니라 처지를 바꿔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의 일도 또한 그런 것. 소원을 빌었다. 달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부모 집이 아닌 내 집에 와 몸을 풀어놓고 나니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내 집이 최고.’ 편의점에서 사온 ‘한가위 도시락’을 먹다가 버스에서 올려다본 달이 떠올라 질질 짜고 말았다. 웃긴 일이었다. 오래 교제한 인간이 있다고 부모에게 다시 잘 말해놓을걸, 뒤늦은 자식 노릇이었다. 그즈음 부모도 자식 생각에 밤잠을 설치는 부모 노릇을 했으리라.
올 추석에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풍경은 이런 것이다.
버스가 포천 어디쯤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였다. 이주노동자 다섯 명이 달 아래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진정 향수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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