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았다. 시간은 있었고 돈은 없었다, 라고 쓰기엔 시간은 조금 부족했고 돈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많아서 부족하게 느껴지고 적어서 알맞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나도 나지만, 많은 이들이 많은 줄 몰라 돈 못 쓰고 부족한 줄 모르고 시간을 쓴다. 그럼 또 어떤가. 그 또한 삶이 가진 재미라면 재미. 가끔은, 어쩌면 자주 생수 한 병도 허투루 사지 않는 이의 영수증보다 다이어트 한약과 ‘치맥’을 동시에 선보이는 이의 영수증이 ‘그뤠잇(Great)’을 맛보게 해준다.

KBS 〈김생민의 영수증〉 파헤치는 재미에 빠진 사무실 동료 이지영씨는 최근 무일푼으로 하루 버티기라는 행위를 감행했다. ‘초코송이’ 과자 하나에 자책과 자위를 오가는 지영씨를 보며 소소한 기쁨에 빠졌다. 한 인간의 고뇌가 몇 백원짜리 과자 한 봉지로 시작하고 끝나는 걸 보며 저이와 나는 똑같은 인간이다, 생각하는 것으로 빡빡한 사무 생활이 잠시 설렁해지기도 했다. 먹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는 문제의 과자를 지영씨에게 건네주었다. 지영씨는 손뼉을 쳤다. 혹 주변 누군가가, 어제 홈쇼핑을 보다가 갑자기, 라고 운을 뗀다면 마음의 지갑을 잠깐 열어서 기쁨을 꺼내줄 준비를 하는 것도 잘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아껴 먹고 아껴 입고 아껴 자는 삶을 고백하던 이들의 얼굴은 얼마나 기쁨에 가까워지려는 표정을 갖고 있었던 건지.

ⓒ시사IN 윤무영영수증은 체험의 보증이다.
여행에서는 특히 그렇다.

최근 여행을 다녀왔다. 연휴 덕을 봤고, 급격히 저하된 주량이 동력이 되었다. 술자리를 줄이니 저절로 술값 영수증이 줄었고 줄어든 술값으로 한 며칠 여행 경비가 모였다. 술값 무섭다. 여하간 여행지에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일 같아, 여독을 빼고 난 이후에 찬찬히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며 영수증을 정리했다. 소비 내용은 단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지에서는 잘 먹고 잘 자면 그뿐. 더 아껴 써야 했나 하는 당연한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에게 여행은 잘 못 먹고 잘 못 자던 생활을 뒤로한 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은 지금의 공간을 이동해가는 경험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살림을 놓아보는 체험이기도 하다. 영수증은 그 체험의 보증 같기도 하다.

영수증을 잘 정리해 같이 여행 갔던 이와 공유했다. ‘생각보다…’라고 말하는 얼굴에서 지금의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쉬움이 많아서 알맞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아쉬움이 적어서 부족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또한 여행의 묘미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여행을 간 한 친구는 타야 할 비행기를 놓쳐서 어느 도시에 잠시 더 머물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오며 그 역시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놓쳐서야 붙들게 되는 아쉬움도 있다. 여행지에서는 붙잡는 것보다 놓치는 게 많아야 하고, 영수증은 그런 걸 재차 확인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여행 중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물건들

때로는 물건의 값을 떠나 소비하지 않던 것을 정신 놓고 소비함으로써 영수증을 그저 영수증이 아닌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손목시계 두 개를 사서 나와 그의 것으로 삼게 되었다. 여행 중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물건이다. 그이는 그게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했고,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그런 좋은 물건이 없었다. 비싼 물건이 좋은 물건이다. 그러나 비싼 물건만으로 조성되는 일상에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숨 쉬고 있다. 우리는 두 개의 시계를 예물 시계라고 불렀다. 우리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는데도. 여행지의 명품 아웃렛에서 제품을 쓸어 담아왔다는 한 친구가 다음 달 카드 값은 잊고 여행 경비를 뽑았다며 허허 웃던 모습도 떠오른다. 어제는 10월의 마지막 날을 괜히 재밌게 만들기 위해 5000원짜리 ‘예쁜 쓰레기’를 하나 샀다. 방 한쪽에 붙여두고서 기쁨에 겨워 불을 켰다 껐다 했다. 어떤 이에게 여행이 떠나지 않고자 하는 행위의 결과이듯, 어떤 이에겐 영수증이 소비하지 않고자 하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어리석은가? 그럼 또 어떤가.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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