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이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러온 게 폭로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리버럴의 사자(liberal lion)’라 자처하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진보 인사 중 하나였다.
그의 추악한 성폭력이 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들을 포함한 할리우드의 여성들은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증언하고 있다. 배우 알리사 밀라노의 제안으로 시작된 ‘미투(me too)’ 캠페인은 SNS 등에서 성폭력을 겪었던 여성들이 ‘me too’라고 적고 공유하며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취지로 시작됐다. 이틀 만에 2만 번 공유되고 댓글 약 6만 개가 달린 가운데, 이번에는 영화감독 제임스 토백이 여성 38명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제2의 와인스타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수많은 성폭력의 위협에 노출된 것은 먼 나라 이야기만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데뷔와 커리어를 미끼로 한 성적 갈취와 폭력, 합의되지 않은 노출 강요, 성접대나 성매매에 대한 강압 등 수많은 사건들이 폭로되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스태프들 역시 남성 연예인이나 남성 스태프들한테 수많은 성희롱과 폭력을 경험한다. 문제를 제기하거나 거부하면 업계 남자들의 귀를 타고 ‘나쁜 평판’이 퍼진다. 공식적인 대응이나 폭로를 감행해도 돈과 권력을 갖춘 가해자들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기다리고 있다. 가뜩이나 여성이 제대로 된 기회를 잡기 어려운 업계에서는 피해자들의 입을 막기에 충분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했던 여성 연예인들 역시 언론 대응과 법정 공방 등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있다.
시계를 2009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자연씨가 남긴 자필 문건으로 인해 사회가 들썩였다. 소속사 대표의 성접대 강요 및 구타와 감금 내용뿐 아니라 접대를 받았던 인물들의 면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경찰 41명이 투입되어 27곳을 압수수색하고 통화 내역 14만여 건과 참고인 118명을 조사했다. 하지만 업계, 언론, 정·재계의 인사들이 포함되었던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누구 하나 처벌받지 않았다. 소속사 대표에게 적용된 혐의도 폭행·협박·횡령·도주 같은 죄목이었고 그는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장자연이라는 여성에게 가해진, 그리고 한국의 연예계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는 구조적인 성폭력을 모두가 외면하는 건 아닌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언론은 당연하다는 듯 폭로자의 배후에 어떤 목적이나 인물이 있는지를 찾는다. 그에 맞춰 폭로를 당한 이들은, 이권과 관련한 난잡한 루머들을 흘리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려 든다. 사태는 곧 난타전으로 바뀌고, 언론은 선정적인 키워드로 도배된 기사를 업로드하며 신나게 올라가는 조회 수에 기뻐한다. 결국 사건은 흔해빠진 이권 다툼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누군가는 그 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피해 사실 폭로했던 여성 연예인들이 겪는 고초
돈과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성을 탐하는 게 당연하고, 그것을 묵인·방조하는 모종의 냉소주의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한국의 언론과 대중은 어느 순간부터 성적 자기결정권 문제와 성폭력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연예인이 속옷을 입었는지 아닌지를 두고 일장 훈시를 하며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따위 말이 쏟아지는 반면, 연예계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겪는 구조적 폭력을 두고 ‘당연한 것 아니냐, 그것도 모르고 왔냐?’라고 비웃는다. 정말 법대로 하면 지금 한국 문화산업의 ‘대부’들은 모두 감옥에 가 있어야 한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단언컨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즐겨야 할 문화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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