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국제공항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50분쯤 운전하면 제주도가 물 산업 육성을 위해 조성한 ‘용암해수 일반산업단지’가 나온다. ‘바다 지하수’로 불리는 용암해수를 이용해 물건을 만드는 업체들이 입주해 있다. 2016년 말 기준 직원 수 35명(서울 영업 직원 포함)인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의 음료 제조업체 ㅈ사도 그중 하나다. 1공장은 생수를, 2공장은 탄산수를 만든다. 11월30일 찾은 이 업체 주변은 고요했다. 갈대를 흔드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1공장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1공장 바로 옆 건물 2층에는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관들이 와 있었고 직원들이 사무실에 출근해 있었다. 이 업체 공장장은 “특별근로감독 중이라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라며 취재진을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실랑이 끝에 ㅈ업체 관계자가 1공장 문을 열어주었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바닥 위에 기역자로 펼쳐진 컨베이어벨트와 이에 연결된 파란색의 거대한 기계들이 눈에 들어왔다. 레일은 멈췄고 이 업체가 생산한 생수 묶음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이 관계자는 1공장에서 일하는 인원이 9명이라고 했다.

이 공장에서 학생 한 명이 죽었다. 공장에서 자동차로 55분 거리에 있는 특성화고등학교인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3학년 이민호군이다. 이군이 속한 자영생명산업과에는 말 산업과 조경, 원예 전공이 있다. 이군은 원예를 전공했지만, 음료 제조업체인 이곳 ㅈ업체 1공장에서 지난 7월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현장실습’을 했다. 이군이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한 것은 생수 제조의 마지막 라인, 그러니까 생수 완제품을 이동시키는 컨베이어벨트와 제품을 쌓는 적재기(팰리타이저), 적재된 생수 완제품을 비닐로 포장하는 비닐포장기(팰릿 래핑기)를 관리하고 포장된 묶음을 지게차로 옮겨 쌓는 일이었다. 공장에서 만난 ㅈ업체 관계자는 이군이 맡은 일을 “기계 오퍼레이션 업무”라고 표현했다. 학교는 이군이 지게차 자격증을 취득해 이 현장실습이 전공에 적합하다고 심의했다.

ⓒ시사IN 조남진

이군은 이 마지막 라인에서 실습을 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CCTV 영상을 보면 11월9일 오후 1시48분 생수를 쌓아 누르는 압착기가 멈췄고 이어 생수를 쌓을 때 중간에 종이를 넣는 기계가 멈췄다. 이군은 문제를 확인하러 기계에 들어갔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오는 순간 압착기가 다시 작동해 내려오며 이군의 머리를 덮쳤다. 이군이 앞으로 쓰러졌고 압착기와 컨베이어벨트 사이에 목과 가슴이 끼었다. 이군과 함께 ㅈ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학생이 이군을 발견했고 직원이 모여들었다. 몇 분간 방치된 끝에 직원들이 임의로 기계에서 빼냈고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군이 다친 뒤 사고 현장에는 ‘위험. 생산 중 진입금지. 압착사고 발생 지역’이라 적힌 흰 종이가 붙었다. 이군이 몸이 끼인 채 발견된 바닥은 박스로 가려져 있었다. ㅈ업체는 이군이 정지 스위치를 작동하지 않고 설비 내부로 들어갔다며 사고의 책임을 이군 개인의 과실로 돌렸다.

정말 그럴까. 학교장과 ㅈ업체 대표, 이군이 서명한 현장실습 표준협약서 제4조는 사업주의 의무로 “현장실습을 지도할 능력을 갖춘 담당자를 배치하여 현장실습생의 현장실습을 성실하게 지도”하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런데 CCTV 영상을 보면 이군은 생수 포장·완성 라인을 혼자 맡고 있었다. ㅈ업체 관계자는 “지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가 지도 담당자라고 주장하는 직원은 기역자로 꺾인 앞 단계 공정에 배치되었다. 이군의 상황이 잘 보이지도 않는 위치다.

정식 사원이 담당하던 업무 이군 혼자 맡아

 

ⓒ고 이민호군 친구 제공고 이민호군이 남긴 카카오톡 메시지. 열악한 작업장 환경은 물론 강도 높은 노동을 시키고 기계 관리도 떠맡긴 정황이 나타나 있다.

시선의 사각지대 문제만은 아니다. 이군을 ‘지도’할 수 있는, 이군이 관리하는 기계를 아는 사람 자체가 공장에 없었다. 이군이 맡은 기계 관리 업무는 원래 정식 사원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 직원은 이군이 현장실습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군에게 약 5일간 기계 고장 시 조치 방법을 알려주고는 퇴사했다. 이군은 지난 8월5일 친구들과의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 이렇게 썼다. “지금 우리 회사 상황이 원래 있던 베테랑들이 우리 같은 초보한테 1주일 미만으로 알려주고 퇴사함.”

 

왜 정식 직원을 다시 뽑지 않고 실습생 한 명에게 해당 업무를 맡겼느냐는 물음에 업체 관계자는 “어차피 우리는 준사원으로 (월급을) 지급했다. 나름대로 근로계약을 맺어놓은 게 있다”라고 답했다. 사실상 취업을 한 것으로 봤다는 얘기다. 업체와 이군이 체결한 근로계약서를 보면 기간만 7월25일에서 2018년 1월30일로 같을 뿐 현장실습 표준협약서와는 판이하다. 표준협약서에서 이군은 ‘현장실습생’이지만 근로계약서에는 “계약 당사자는 사원으로서 회사의 생산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 표준협약서에는 ‘현장실습 시간은 1일에 7시간, 1일 1시간 한도 연장할 수 있다’ ‘야간 및 휴일에 현장실습을 시켜선 안 된다’ 따위 내용이 있지만 근로계약서에는 주 40시간 근무하되 합의에 의해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고만 되어 있다.

이군에게 실제로 적용된 것은 현장실습 표준협약서가 아니었다. 표준협약서는 업체 대표와 교장, 실습생이 한 부씩 갖도록 되어 있지만 이군 것은 학교가 보관했다. 현장실습 표준협약서 제21조는 현장실습 계약과 근로계약을 함께 체결하면 현장실습생의 근로조건은 해당 근로계약에 따르도록 못 박고 있다. 이 특례 조항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현장실습생이 취업과 연계되어 사실상 근로에 종사하는 경우 노동관계법을 적용해 (학생을) 근로자로 ‘보호’한다”라는 명목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조항은 기업을 학생 지도와 보호의 부담에서 해방시키는 ‘면죄부’가 되었다. 이 업체 관계자는 말했다. “실습생이라고 그냥 데려다놓고 옆에다 멘토를 붙여서 ‘넌 그냥 쫓아만 다녀라’ 이렇게 끌고 다닐 수 있는 기업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겠나? 객관적으로 볼 때 그 돈을 줘가면서 봉사활동할 기업이 얼마나 있겠느냐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열여덟 살 먹은 애들한테 우리도 봉급 250만원까지 챙겨주고 잔업수당 다 주고 4대 보험 들어주고 해줄 수 있는 만큼 한 거다”라고 주장했다.

이군의 생각은 업체와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숨진 이군은 말이 없지만 기록을 남겼다. 이군은 친구들과의 카카오톡 단체방에 여러 하소연을 남겼다. 성수기는 특히 힘들어했다. “살려줘… 너무 더워. 여기 공장 내부 온도 43도 실화냐(7월20일).” “아직 고딩인데 메인 기계 만지는 것도 극혐인데 기계 고장나면 내가 수리해야 됨. ㅂㄷㅂㄷ. 야근은 덤이구. 작업장 실내온도 진짜 실환가 싶을 정도로 개힘듬. 절정으로 치닫으면 40도 넘고 안 그래도 35도에서 40도 사이 왔다갔다 (중략) 그 안에서 12시간 동안 앉지도 못하고 왔다갔다 ××함. 단 1분을 못 앉음(8월6일).” 기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혼자여서 부담도 더 컸다. “원래 7시30분 출근해서 6시 퇴근인데 내 거 기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나 혼자 10시30분 퇴근(9월18일).”

이군과 친한 한 친구는 “공장 일이 힘들다고는 했지만 못 버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에 사람들이 ‘여기도 열악해’ ‘오늘도 야근이야’ 말하듯 거의 매일 이야기한 정도였다. 잔업이라 게임 같이 못한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카톡 반응이 없으면 아직 야근하나 생각했다. 기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어서 자기 없으면 공장이 안 돌아간다고도 했다”라고 말했다.

사고 징후와 이군의 호소 모두 묵살해

이군이 친구들에게 하소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가족이 공개한 이군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면 이군은 사고 직전까지 업체에 자신이 일하는 상황에 대한 시정을 적극 요구했다. “공장장님 파렛타이저 혼자 보고 있습니다 한 명 더 부탁드립니다(10월27일).” “이사님 저 이민호입니다. 간지 공급장치가 간지를 공중에서 그냥 놔버려서 기계가 자꾸 멈춰버립니다(10월27일).” 하지만 이런 SOS에 책임 있게 답한 어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당일까지 이군은 자신이 맡은 기계를 혼자 보았다.

사고 징후도 두 차례 있었다. 9월15일 이군은 퇴근한 뒤 회사가 추가로 호출해 일을 하다 휴대전화 액정이 깨졌다. 단체 카카오톡을 보면, 이군은 이 일로 회사가 수리비를 준다고 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학생이잖어. ㅋㅋㅋㅋ. 내가 찌르면 ×되는 거잖아. 추가근무 자체가 불법인 상황인데(9월22일).” 9월20일 이군은 1.5m 높이 기계에서 떨어져 등을 모서리에 부딪치는 사고를 겪는다. “안 올라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나밖에 할 사람도 없었구(9월22일).” “아파서 혼자 못하니깐 한 놈 붙여달라 했는데 응 아니야(9월26일).” 이군은 사흘간 병가를 내고 복귀했다. 이군이 쉰 기간에 공장은 돌아가지 않았고 업체는 출근을 독촉했다.

 

ⓒ시사IN 조남진고 이민호군이 사고를 당한 현장.
회사 측은 현장실습생이었던 이군을 신입 사원으로 취급하며 생산라인 자동화설비를 관리하게 했다.

실습 기간에 학교는 이군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학교는 담임교사가 두 번 현장을 방문했다고 설명했지만 유리창 너머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학교 강원효 교장은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지도 담당자가 있었는데 사고 당시에는 없었다”라면서도 퇴사한 직원이 지도 담당자였는지 묻는 질문에 “그것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계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도 학교는 부모 전화를 받고 알았고, 회사에는 전화로만 확인했다. 김수환 교감은 “계속해서 모니터링 못한 부분도 있다는 것만 말씀드린다”라고 말했다. 32년째 제주도에서 특성화고 교사로 재직 중인 김영보 제주여상 교사는 “보통 취업 담당 교사가 점검을 하는데 이 학교처럼 경력 2년차 담임이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제주도교육청은 2년 계약을 더 연장하지 않아 학교마다 있던 취업담당관도 사라졌다. 사고가 났는데도 복교시키지 않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구조적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인재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이군의 SOS에 어른들이 답하지 않은 끝에 11월9일 사고가 났다. 학교는 이 사고 역시 같은 업체에서 실습하던 학생이 알려서 알았다. 이군은 심폐소생술을 받은 끝에 다시 심장이 뛰었다. 그때부터 이군 아버지는 공장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고 CCTV 영상, 관련 서류 등 자료를 모았다. 사고 현장에 펜스가 쳐져 있지 않았고 업체가 뒤늦게 치려고 사놓은 것도 아버지가 알아냈다. 다만 당시에는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아들 살리는 게 먼저라고 여겼다.

사고 열흘 만인 11월19일 아들의 숨이 끊어졌다. 11월21일 발인이 예정돼 있었다. 업체는 이군이 사경을 헤맬 때 이군에게 책임을 돌리는 내용의 산업재해 신청서를 부모에게 내밀었다. 부모는 장례를 미뤘다. 업체 대표 자식이라면 그럴 수 있겠냐며 사과부터 하라고 했다. 이군이 쓰러진 지 3주가 지난 12월1일 현재까지 회사는 사과하지 않았다.

ⓒ시사IN 조남진시민들이 고 이민호군을 추모하는 글을 포스트잇에 적어 제주시청 앞 버스정류장에 붙였다.

11월29일 제주도교육청은 사고 발생 20일 만에 공식 입장을 내고 사과했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이석문 제주도 교육감은 공식 입장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수능이 일주일 연기되면서 수능에 모든 행정력이 집중되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그날 오후 3시 이 교육감이 조문을 왔을 때 정치인들이 보낸 화환 속 국화는 시들어 있었다. 11월29일 오후 이 교육감이 가고 난 뒤 아버지는 빈소에서 소방서에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CCTV에 보면 직원이 민호 사고 현장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달라고 하니 119 구급대원에게 보내고 지웠다고 합니다. 알아봐주실 수 있나요?” 아버지는 여전히 혼자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입관할 때 아들에게 왜 죽었는지 꼭 밝혀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학교는 이군보다 기업 편이었다고 아버지는 한탄하기도 했다. 학교 교장은 도의회에서 질타를 받은 다음 날인 11월28일에야 학교 학부모들에게 사과 문자를 돌렸다. 이민호군 아버지도 받은 문자에는 ‘이민우’라고 잘못 쓰여 있었다.

11월30일 오후 찾은 민호군의 학교에는 추모 현수막 하나 없었다. ‘뜻을 품고 새로운 미래를 열자!’라는 표어 아래에서는 특성화고등학생 권리연합회가 이군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바라는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학생 100인 선언 서명을 받고 있었다. 하교하는 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서명에 참여했다. 한마디를 적는 칸에는 ‘사과하라’ ‘힘내세요’ ‘미안하다’를 적었다. ‘나라 수준’이라고 적은 학생도 있었다.

같은 반 친구는 이군의 학교 책상에 국화가 놓여 있다고 했다. 수능이 일주일 연기된 11월23일은 이군의 생일이었다. 이군은 생일을 나흘 앞두고 눈을 감았다. 이군은 8월13일 친구들에게 보낸 카카오톡에서 자신이 저축을 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날지 모르고 내가 일하는데 자체가 위험한 데여서 돈을 어느 정도는 남겨둬야 후환이 안 두려움”이라고 썼다. 사고 당일인 11월9일, 사고 두 시간 전인 오전 11시51분 이군은 친구들에게 “내일 집 간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결국 그는 집에 가지 못했다(12월2일 업체 대표가 이군 부모에게 사과했다. 이군의 장례는 12월6일 교육청장으로 치러졌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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