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생전 없었던 영어 교육 관련 질문을 몇 차례 받았다. 내게 질문이 날아오는 이유는 엉뚱하게도 어린이집 방과후 영어 교육이 금지될 거라는 소식 때문이었다(1월16일 교육부는 어린이집 영어 교육 금지 정책을 전면 보류했다). “진짜 지금 영어 안 시켜도 괜찮아요? 초등학교는 어때요?” 초조한 목소리였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영어를 안 배워도 나중에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렇게 하겠는데 도통 갈피를 못 잡겠다고 했다.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작년에 3학년 담임을 했고, 3학년부터 영어 수업이 시작된다. 우리 학교에는 영어 전문 강사가 있어서 나는 지난 1년간 영어 수업을 하지 않았다. 원론적인 답변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잘한다는 게 어느 정도까지를 의미하는지… 한국처럼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미리 공부하면 처음 배우는 아이보다 편하겠죠.”
“역시 그렇겠죠?” 너무 평범한 내용이라 실망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표정이 차분해졌다. 마치 예견된 반응인 것처럼 영어 유치원은 지나치게 비싸니 다른 영어 프로그램을 알아보겠노라며 말끝을 흐렸다. 오해가 있는 듯했다. 나는 공교육만으로 부족하다는 뉘앙스를 주려던 게 아니었다. 꼭 영어가 아니더라도 특정 교과에 쏟는 시간과 노력이 많으면 당연히 일정 수준까지는 학업성취도가 상승한다. 비록 교육을 받는 학생이 공부를 무척 싫어하고, 자신감도 없고, 즐거움까지 못 느낀다고 해도 말이다. 그 단적인 예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이다.
충분히 잘하는데 왜 더 못 시켜서 안달일까
PISA 2015 협력적 문제해결력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OECD 참여국 중 2~5위로 ‘여전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내적 동기, 도구적 동기, 자아 효능감, 자아 개념 항목은 ‘한결같이’ 낮은 순위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 아이들은 충분히 공부를 잘하는데, 왜 더 못 시켜서 안달인 것일까?
그 힌트를 어린이집 학부모 채팅창에서 찾을 수 있었다.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은 영어 특별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번에 영어 교육 이슈가 터지자 채팅창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엄마들은 “영어는 어차피 해야 하니”로 말문을 열었다. 아무도 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행복한 삶 같은 거창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학부모들은 영어를 못하면 ‘개고생’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다. 영어는 먹고사는 사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영어 포비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내 자식 내가 영어 시키겠다는데 누가 이래라 저래라야”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불안과 공포에 잠식된 사람들의 귀중한 돈도 사교육 업체로 흘러들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해야 하니 미리 시키겠다는 선언이 반갑지 않다. ‘어차피’라는 표현은 모든 선행 학습을 정당화한다. 사교육 광풍의 핵심은 경쟁에서 남보다 우위에 서는 데 있으므로 언제나 ‘조금만 더’를 향해 간다.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끝이 없는 싸움이다.
초등학교 영어 수업에서 학습 목표에 도달하는 수준을 바란다면 굳이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된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우리 집 아이들은 영어를 따로 배우지 않는다. 때가 되면 다 하겠지 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교사인 나도 두렵다. 어쩌면 학부모들이 진짜 화가 난 대상은 어린이집에서 영어 못 배우게 하는 교육부가 아니라, 외국말 좀 못한다고 차별하고 핍박하는 모진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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