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2일 평창 동계올림픽 공연에 앞서 북한 예술단 사전점검단이 1박2일 일정을 마치고 돌아갔다. 같은 시각 일본 도쿄에서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공격을 가정한 도심 최초 대피훈련이 실시되었다. “평양올림픽” 발언으로 공분을 산 고이케 유리코가 수장인 도쿄 도청과 한국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내각관방이 주최했다.
한반도 긴장 완화에 대한 아베 정부의 알레르기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안보 장사’ 프레임으로 진단하기에도 그들의 정치 행보는 지나치다. 그들의 정치적 뿌리가 닿아 있는 ‘보수 본류’의 행보를 더듬어보면 이상행동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승공연합의 위세는 대단했다. 한일협정이 체결된 지 10년도 안 되었던 1974년 5월7일, 왕궁 근처에 자리 잡은 일본 최고의 호텔(제국호텔)에서 집회를 열었다. ‘희망의 날 만찬회’로 이름 붙은 이 모임의 연사로 문선명 통일교 총재가 나섰다. 명예실행위원장은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자 정치적 친부나 다름없는 기시 노부스케였다. 현재 아베의 행보는 보수 본류의 상징적 인물인 기시 노부스케의 그것과 정확히 겹친다.
기시 노부스케(1896~1987). 본명은 사토 노부스케이다. ‘기시’는 그가 처가의 양자가 되면서 받은 이름이다. 1920년 도쿄 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농상무성(農商務省)에 들어갔다.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에 올랐다. 하지만 총리와 대립하여 내각 총사퇴를 초래했다. 종전 후 기시는 A급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기도 했다. 1953년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나섰고 1957년 총리가 되었다. 1960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추진해 국회 비준을 강행함으로써 국민의 비난을 받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총리직을 사퇴한 기시가 만찬회 개최에 소매를 걷어붙인 데는 승공연합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시의 이런 행보는 만주국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박정희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5·16 쿠데타 이후 미국으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던 남로당원 전력이 콤플렉스였던 박정희의 행보와 비슷하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된 파시스트 기시에게 ‘반공’은 동서 냉전기 핵심 동맹국 정치지도자로 살아남기 위한 사상적 알리바이였다. 하지만 극동국제군사재판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미국을 상대로 벌인 태평양전쟁이 “성전”이었다는 기시의 ‘혼네(本音·속마음)’는 흔들린 적이 없다. 아베는 그런 기시의 정치적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외할아버지 가이드라인 따라 군국주의화
1951년 9월8일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복권된 이후 기시가 보여준 행보는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극우 정치세력에게 ‘모범답안’이 되었다. 기시는 강한 친미 노선을 유지하던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을 통해 국회로 돌아갔지만 이내 결별하고 독자적인 대권 행보를 걸었다. 아베도 ‘부시의 푸들’이라 불리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관방장관을 거쳐 총리가 되었지만 대권에 재도전하면서 고이즈미와 선을 그었다. 기시 노부스케가 추진한 ‘민족의 혼이 표현된 헌법’ 제정을 통한 ‘자주적 방위(실은 재무장 및 군국주의화) 실현’과 미·일 안보조약 체결은 아베 정부 들어 진화를 거듭했다. 바로 평화헌법(헌법 제9조) 개정을 통한 국방군 창설, 미군과 자위대의 일체화 추진 등이다.
특히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중국을 견제한 기시의 노선을 아베가 이어받은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기시는 총리 취임 3개월째이던 1957년 5월 인도·파키스탄·스리랑카·타이·타이완, 같은 해 12월 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인도네시아 등을 순방하며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공을 들였다. 반둥회의에 참가해 네루와 교류하는 등 외교적으로 탁월했던 저우언라이를 의식한 결과다. 마오쩌둥에게 패해 타이완으로 밀려난 장제스와의 관계를 강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과는 정경분리 원칙을 말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아베는 이런 기시의 노선을 충실히 답습한다. 2013년 1월 취임 후 첫 순방지로 베트남·타이·인도네시아 등을 선택한 그는 아세안(ASEAN)을 파트너로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룬다는 이른바 ‘아세안 외교 5원칙’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허울에 불과했다. 애초에 중국과의 영토 분쟁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끝까지 막후 권력자로 남았던 기시는 평생 동아시아 평화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깊숙이 관여하고 일·한 협력위원회라는 민간위원회까지 결성했지만 파벌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미국의 묵인 혹은 방조 아래 이루어지는 대일본제국의 부활뿐이었다. 한반도의 해빙 무드가 지속될수록 아베를 비롯한 일본 극우 정치세력의 이상행동 또한 빈번해질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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