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도 새롭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조현민 대한항공 여객마케팅 전무의 집무실이 있는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6층에서 근무했던 한 직원은 “터질 게 터졌다”라고 말했다. 가로로 길게 뻗은 건물 6층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조 전무가 지르는 소리가 수시로 들려, 직원들에겐 아주 익숙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매주 월요일, 조 전무가 50대 이상 임원들에게 반말을 섞어가며 고함치는 것을 들었다. 본부장급 임원들을 세워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몇 분 있으면 또 그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복도를 지나기도 한다. 서류철을 책상에 내리치거나 문을 꽝 닫고 뭔가를 던지는 소리도 일상사였다.”

본사 건물에 새로 전입한 직원들 역시 처음에는 놀라지만 차츰 이런 풍경에 적응하곤 했다. ‘상황’이 개시되면, 직원들은 “또 시작이다”라며 옥상에 담배 피우러 갔다. 서로 낄낄거리며 “오늘 강도는 10 중에 몇이다”라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인사권을 장악한 조현민 전무의 행실을 지적하거나 따질 수 있는 직원은 흔치 않았다.

ⓒ시사IN 조남진서울 강서구에 있는 대한항공 본사.
그나마 회사 업무 체계에서 지휘부에 있었던 조현민 전무뿐 아니라 어떤 직위도 갖지 못한 조양호 회장 일가의 구성원까지 마치 영주처럼 권력을 휘둘렀다. 대한항공의 한 승무원은 “회사 내에서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는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조양호 회장의 부인)이 승무원 바지 길이까지 세세하게 관여한다. 심지어 흰색 블라우스 안에 끈으로 된 러닝도 못 입게 한다. 검사도 받았다”라고 말했다. 오너 일가는 국내법의 테두리도 넘나들었다. 해외에서 산 고가의 명품을 ‘상주 직원 통로(항공사 직원들이 업무 목적으로 세관이나 출국장을 드나들 때 이용하는데, 세관 요원이 없다)’로 반입시켜 세관을 우회한다는 의혹 역시 “공공연한 이야기”라고 복수의 직원들은 전했다.

문제는 오너 일가를 누구도 견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조도 마찬가지였다. 대한항공에는 노동조합이 세 개 있다. 대다수 직원이 소속된 노동조합은 한국노총 산하의 ‘대한항공 노동조합’이다(직원 1만9000여 명 가운데 약 1만1000명). 객실 승무원, 정비사 등 조종사 외 모든 직원이 이 노조에 입사와 동시에 자동으로 가입된다. 민주노총 산하인 ‘대한항공 조종사노동조합(조합원 약 1100명)’과 독립노조인 ‘대한항공 조종사 새 노동조합(군 출신 직원 중심의 노조로 조합원 약 600명)’은 조종사만 조직 대상으로 삼는다.

직원들은 ‘대한항공 노동조합’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직원은 “노동조합 간부와 회사 수뇌부가 ‘짝짜꿍’하는 구조다. 조합원의 목소리를 전혀 대변해주지 않는다. 입사하면 자동 가입되고 조합비도 빠져나가지만 어떤 활동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전했다. 대한항공 노조의 위원장은 조합원 100명당 1명꼴인 대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뽑는다. 대의원이 되려면 20명의 추천이 필요하다. 이 직원은 “직선제로 바뀌어야 조금이라도 조합원 목소리가 더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대한항공의 조현아(왼쪽)·조현민 자매.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대책은 빈말에 그쳐

대한항공 노동조합을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게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대한항공에도 이른바 ‘민주노조’ 바람이 불었다. 객실 승무원들이 독자적 노동조합 설립을 추진하다가 결국 기존 노조(대한항공 노동조합)에 들어가 조직을 바꾸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 과정에서 7명이 이런저런 사유로 해고되었다. 해고자 가운데 4명은 노동위원회 심사나 법정 투쟁을 거쳐 부당해고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중 2명은 이미 정년이 되어버렸거나 다른 회사에 취직한 뒤라 복직을 하지는 못했다. 노조 활동으로 해고된 전직 대한항공 직원은 노조에 분노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항공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해고가 정당하다고 법원에 의견서를 냈다. 해고된 조합원을 제명하기도 했다.”

당시 해고되지 않은 이들 역시 노조 활동 뒤 강등 등 각종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고 복수의 전·현직 직원이 증언했다. “대한항공에서 끊임없이 노동조합을 민주화·직선화해보려고 애쓴 사람들이 있었지만 번번이 인사평가로 저성과자를 만들거나, 비행 나가면 실수하는지 감시하는 ‘X맨’을 붙이거나, 친구들한테 찾아가서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거나, 국내선으로 내려보내고 팀에서 빼버리는 등 온갖 인사 불이익을 주었다.”

노조라는 견제 장치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대한항공 직원들은 오너 일가의 ‘갑질’에 노출되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마카다미아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아 박창진 사무장을 항공기에서 내리게 한 2014년 12월 ‘땅콩 회항’ 사건이 단적인 예다. 조양호 회장은 2015년 1월 신년사에서 “사내외의 덕망 있는 분들을 모셔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소통위원회’를 구성하고, 경계 없는 의견 개진을 통해 기업 문화를 쇄신하겠다”라고 후속 대책을 밝혔지만 소통위원회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조현아 전 부사장은 1심에서 징역 1년, 2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항공기가 지상에서 이동하는 경로는 항공보안법상 ‘항로’에 포함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그녀의 ‘항로 변경’ 혐의가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 항공보안법상 항공기 안전운항 저해 폭행, 형법상 업무방해, 강요 혐의 등은 유죄로 인정되었다. 그녀는 집행유예 기간 중인 지난 3월29일 한진칼 자회사 칼호텔네트워크의 사장으로 복귀한다. 여운진 당시 대한항공 상무 역시 그녀의 범법 행위를 은닉한 혐의 등으로 징역형(집행유예)을 확정받았지만, 지난 3월18일 대한항공 자회사인 에어코리아 상무로 복귀했다. 사건의 피해자인 박창진 전 사무장은 공황장애 등 진단을 받아 1년여 휴직 뒤 2016년 4월 복직했으나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되었다. 한 대한항공 직원은 냉소했다.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조현민 전무의 고함이 일시적으로 잠잠해졌다. 그러다 몇 달 만에 다시 시작되더라. (조 회장 일가는)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 이번 사태에서 증명되었다.”

ⓒ시사IN 조남진대한항공 본사에 대한항공의 3개 노조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발표한 공동성명서가 붙어 있다.
대한항공 노조는 땅콩 회항 사건과 관련해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박 전 사무장은 4월1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갑질이 이어지는 이유는 내부적으로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독단을 견제할 시스템이 돼 있지 않고, 민주적 노조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노동조건과 관련해서도 대한항공 노조는 2017년 5월 임금 조정을 회사에 위임했으나 1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회사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05년과 2007년에도 임금협상을 회사에 위임했고 2008년에는 임금 동결 선언과 함께 단체협약 권한 일체를 역시 회사 측에 위임했다. 2012년에도 임단협을 위임했다.

“민주주의가 기업의 문 앞에서 멈췄다”

사내 인트라넷에 대한항공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된 고객 불만이 올라오고, 조양호 회장이 ‘No Mercy(자비를 주지 마라)’ ‘징계해’ 따위 댓글을 다는 순간 직원들은 “면담, 경위서로 완전 탈탈 털려 죄인 취급을 받는다”. 스케줄은 전날에도 바뀔 수 있고, 면세품 판매에 동원되어도 돈이 비면 개인 돈으로 변제해야 한다. 대한항공이 객실 승무원 연차 사용을 제한했다며 국토부가 객실 승무원 추가 채용을 권고해도 회사는 추가 채용 대신 ‘10명이 하던 서비스를 9명이 하라’고 대응한다. 취재 과정에서 만나거나 통화한 직원들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수단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노동조합의 역할을 둘러싼 의문에 대해 한 대한항공 노조 간부는 “순수한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음해하는 세력, 민주노총 쪽에서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노조 선거제도나 조합비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박창진 사무장도 노조에서 가장 먼저 연락했지만 노조 도움을 원치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 이후 3개 노조는 공동성명을 내고 조현민 전무 파면과 공식 사과, 재발 방지 등을 회사 측에 촉구했다.

사람에게 물을 뿌리는 행위는 ‘폭행죄’에 해당하지만, 피해자가 원해야 처벌이 가능하다. 이른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다. 최근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가 새어나오면서 대한항공 내부에서는 ‘이러다 물 뿌린 사건은 용두사미가 되고 음성 파일 제보자만 신세 망치지 않겠느냐’ ‘다시 아무렇지 않게 복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팽배하다. 한 직원은 “회장 일가는 기본적으로 임직원을 대화 상대로 보지 않는다. 언제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걸로 보인다. 경영 능력도 검증되지 않았다. 범법 행위에 대해 엄중히 처벌받고, 근본적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공항에서 근무하는 한 대한항공 직원은 “민주주의가 기업의 문 앞에서 멈췄다.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정상적인 노조가 없는 한 대한항공(혹은 조 회장 일가)과 노동자는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항공운송 사업이 필수유지업무로 지정되어 파업 기간에도 국제선 80%가 운행되어야 하는 등 파업권 자체가 무력화되는 현실도 바꿔야 한다”라고 김성기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위원장은 말했다. 대한항공은 “물컵을 바닥에 던져 물이 튀었으나 사람에게 물을 뿌리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했고, 언론에 공개된 음성 파일에 대해서는 “조 전무인지 확인할 수 없다”라고 밝혔지만 ‘갑질’ 폭로는 확산되고 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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