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받아들이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자주 쓰지 않아서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며 들은 말이었다. 아픔을 거부할수록 더 아파지고 아픔을 받아들일수록 덜 아프게 된다는 강사의 말을 듣고 일단은 통증을 꾹 참아보았다. 거부에서 인내로, 참음에서 참지 않음의 경지로 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나름 수련인의 본보기가 되어보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최근 요가를 시작했다. 몸의 통증을 줄여보자는 마음에서였다.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 이 단순한 마음을 먹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흔을 앞두고 시급했다. 다들 말했다. 서른 다르고 마흔 다르다. 마흔 줄에 들어서면 몸에 급격한 반응이 찾아온다는 친구들의 말을 들을 때는 잘 몰랐다. 때가 되면 찾아오는 몸의 정직을. 서른 즈음에 찾아오는 마음의 정직함을 노래한 이도 있었으니, 몸의 정직함을 새삼 알게 되는 나이는 마흔 즈음일지도 모르겠다.

ⓒ시사IN포토내 몸의 시간을 소비하면서 일순간 찾아오는 마음의 고요를 마주했다.

내가 다니는 요가원은 ‘느릿느릿’을 수련의 과정으로 삼고 있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동작을 완성하고 다시 천천히 동작을 풀어주고 또 한번 천천히 동작을 반복한다. 그 ‘느림’에 몸과 마음을 맞추는 일이 동작을 실현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함을 깨치는 일일 텐데, 하다 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빠른 것에 맞춰져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는 고역의 순간을 여러 차례 맞게 된다. 두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가 거두어들이는 일이 실은 이렇게도 오래 힘써야 하는 일임을 몰랐다. 비록 일주일에 두세 번, 한 시간씩이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내 몸의 시간을 소비하면서 일순간 찾아오는 마음의 고요를 반짝 마주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손끝에 힘을 주어 두 팔로 공기의 내막을 부드럽게 열어젖히는 일과 허리를 꼿꼿이 세워 몸속을 어지럽게 흘러다니던 기(氣)의 방향을 아래에서 위로, 땅에서 하늘로 맞추어주는 일에 집중하면서 점차로 느꼈다. 우리가 고요와 마주하여 사는 일을 자주 잊고 있음을. 그 무념무상의 상태가 어쩌면 인간의 몸이 원초적으로 감각하고 있던 것임을. 건강한 몸은 건강한 고요가 필요하다.

요가를 시작하고 허벅지와 종아리에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묵직하고 뻐근한 증상이 다소간 개선되고 보니 어쩐지 다음 달에는 일을 만들지 말고 조용히 살아보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달력에 이런저런 일정이 들어찼다. 무엇으로부터의 방심이 몸과 마음을 다시 그 신속한 속도에 맞추게 한 것일까. 지금보다 열 살쯤 어렸을 때는 직립하는 인간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기립하는 인간이 되고자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고요는 언제나 밑바닥에 있었는데 말이다.

통증이 있는 내 몸에 익숙해지는 것

어깨나 고개를 아래로 툭 떨어뜨리고, 어깻죽지를 활짝 열었다 닫아주고, 정수리를 크게 넓혀주며 숨 쉬는 자세를 수련하다 보니 몸에서 힘을 빼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한다던 한의학적 처방을 받았던 때가 생각났다. 몸에서 소란을 빼는 연습. 마음의 내란이 잠잠해질 때 ‘아픈 몸을 살다’라는 말이 통증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통증이 있는 내 몸에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몸의 아픔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픈 몸에 대한 공포의 근원을 천천히 살펴보다 보면 결국은 ‘홀로됨’에 대한 두려움과 직면하게 된다. 아픔의 순간에 나는 홀로일 수 있고, 그 홀로 있음을 수긍하는 순간에 드디어 우리는 그 ‘병든 몸을 살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때때로 이런 홀로서기 연습도 필요하다. 한낮에,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방바닥에 큰대자로 벌러덩 누워 말없이, 숨 쉬었다. 가벼운 팔다리도, 무거운 팔다리도 모두 내 것이었다. 지독한 신경증을 앓으며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하는 지혜를 익힌 일본 작가 사노 요코는 분명 아픈 몸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저 명징하고 용감한 생의 감각을 터득했을 것이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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