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걸을래’라는 말을 들었다. 계절이 돌아왔구나 싶었다. 걷는다는 말은 초여름의 말이다. 그렇게 분류하고 싶다. ‘만진다’는 봄의 말로, ‘앉는다’는 가을의 말로, ‘붙는다’는 겨울의 말로 적합하다. 말을 어떻게 계절별로 분류하는가가 곧 나의 사계절 습성을 드러낸다. 너무 덥지도, 습하지도 않은 요즘 같은 때에 걷는 행위는 그 자체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혼자이면 사색적이고 여럿이서는 의기양양하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대화의 물꼬를 터보자 넌지시 청유하는 일은 여하간 정겹다. 특정한 방향도 없이 그저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말하게 되는 침묵의 신비로움을 경험한다. 이제 막 연애의 싹이 돋아나는 이들이 쉬이 제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며 집 앞을 무한히도 서성이는 건 그 침묵의 경이로움에 빠져서이리라.

ⓒ시사IN 신선영어제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길고양이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얼마 전, 오래 교제 중인 이와 다퉜다. 내 편에서는 우리의 대화가 문제였고, 상대편에서는 내 말이 문제였다. 냉담한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의 속마음을 살짝 내비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했으나 나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말이 상대의 마음에는 상처로 남아 있었다. 상대방이 복기해주지 않았다면 기억할 수 없었을 농담 한마디였다. 농담은 진담 사이에 박힌 가시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의도를 설명했으나 상대방이 바라는 건 해명이 아니었다. 그이는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고유한 말을 원했다. 미안해. 그런 말이 상처가 되었구나. 그 짧은 말을 그토록 어렵게 하면서 농담과 진담,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되는 말 앞에서 참 시건방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이 한 사람과 믿음, 소망, 사랑을 쌓아나가는 일은 한편으로 서로가 가진 말의 습성을 천천히 이해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함께 걷기 위해 서로의 보폭을 살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듯이 두 사람의 대화에도 적절한 멈춤과 움직임이 필요하다. 그이는 더 움직였다. 자신은 공감과 배려와 존중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 큰 말을 그이가 참 작게도 말해서 나는 그 말을 만지거나 그 말에 붙어 앉을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러고 보면 ‘말하다’라는 동사는 온전히 사계절의 말이다. 

대화하고 싶은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

어제저녁에는 한 사람에게 좀 걷자고 말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길고양이 몇 마리를 만나서 인사 나누고, 장미의 붉음과 가로수의 초록이 짙다 감탄하고, 작은 카페에 들러 자두 주스도 마셨다.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누구를 뽑아야 할까, 반인권적 혐오 발언을 유권자 마음잡기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이(들)의 면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벽보를 보고 다르게 마음보를 쓰는 일은 얼마나 신기한지. 색 조합과 폰트의 미를 아는 이가 만들었을 ‘시건방진’ 벽보에 적힌 페미니스트라는 명명이 ‘일꾼’이라거나 ‘○○전문가’라거나 하는 말에 비해 유독 신선하여 그 ‘정치인’과 더 오래 대화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표심이란 대화하고 싶은 사람에게로 향하는 마음의 다른 말이다. 많은 정치인이 일단 당선되면 그 대화의 물꼬부터 차단해버리고는 하지만 말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보고 감격한 것은 남북한 정상의 만남이 아니라, 그 둘이 함께 걷고 말할 수도 있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날 밤 나는 저녁이 있는 삶에 관한 시를 한 편 적었다. 두 사람이 걷고 대화하고 넘어가기도 하고 넘어오기도 하며 ‘너나 씻고 다녀라’ ‘너란 존재 인정 반대한다’는 사람이 지껄인 혐오 발언을 돌려보내고 결국에는 양손 무겁게 공감과 배려와 존중의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이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잘 먹고 잘 자는 삶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잘 걷는 삶이기도 하다. 걷는 사람만이 애쓴다. 왜냐하면 걷고 있는 사람만이 걷는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말을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