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목적의 상의 탈의는 당연히 보호되어야 하는 여성의 권리이다. 음란물은 세 가지 요건으로 정의된다. 첫째 노골적인 성적 노출, 둘째 성적 도덕의 위반, 셋째 ‘하등’의 사상적·사회적 가치의 부재이다. 공연음란죄는 현장성이 가중시키는 공격성 또는 흥분성 때문에 이 기준이 조금 더 낮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정치적 목적의 상의 탈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 세 번째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음란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적 목적의 상의 탈의는 어떨까? 예를 들어 미국 패션잡지 〈배너티 페어〉에 실린 엠마 왓슨의 가슴 노출 사진과 제니퍼 로런스가 입은 허벅지가 깊이 파인 베르사체 드레스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할리우드에서 페미니즘 확산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외 디지털 권리 콘퍼런스에서는 ‘성적 표현의 자유’에 관한 토론회가 자주 열린다. 이런 토론회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이 익명으로 연락하고 교감하기 위한 포스팅을 검열하는 데 대한 비판적 논의가 많이 이뤄진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소수자’는 LGBT에 한정되지 않는다. 스크린을 방패 삼아 안전하게 성적 표현을 하고 관찰자들과 교감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된다. 지난 2012년 논란이 되었던 ‘정봉주 응원 비키니’ 사진도 관찰자의 시각적·성적 자극을 위해 자기 자신을 노출하는 표현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성적 목적의 상의 탈의는 ‘사상적·사회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규제되어야 할까? 음란물의 기준이 되는 사상적·사회적 가치는 가부장제하의 다수에 의해 정의된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 행동은 어떻게 다원주의 사회와 충돌을 피할 수 있을까?

정치적 상의 탈의자들도 음란죄의 법적 요건에 따라 자신의 상의 탈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들의 행동은 가부장제적 여성 섹슈얼리티 통제에 대한 저항이자 가장 기본적으로는 남성과의 동등한 자유의 발로다. 섹슈얼하기 때문에 더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지만 ‘섹슈얼하더라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연합뉴스2일 오후 서울 강남구 페이스북코리아 앞에서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페이스북의 성차별적 규정에 항의하는 상의 탈의 시위를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앞서 페이스북이 남성의 반라 사진은 그대로 두면서 여성의 반라 사진만 삭제하는 점을 규탄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여성 섹슈얼리티 통제에 대한 저항과 남성과의 동등한 자유의 발로는 성적 목적의 상의 탈의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관찰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든 관찰자의 시각적·성적 자극을 위해 자기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든, 통제받지 ‘않아야’ 하고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명제는 똑같이 적용된다. 성적 목적의 상의 탈의 역시 음란물로 규정될 수 없음은 물론 정치적 목적의 탈의와 같은 성 해방의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너무 많은 남성이 성적 대상화의 주체인 현실

성적 대상화는 남성이 여성을 성행위의 대상이나 성적 쾌락의 도구로만 보는 것이다. 최근 열린 ‘혜화동 생물학적 여성 시위’에 등장한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구호가 이에 대한 비판의 전형이다. ‘성적 대상화’를 문제 삼게 되면 성적 대상화를 불러일으키는 성적 표현은 물론이고 성적 상의 탈의와 포르노그래피에 관해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발화해도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세컨드웨이브 페미니즘’의 시발이 되었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따라가 보면 ‘성적 대상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지구라는 별의 20세기에 너무 많은 남성들이 대상화의 주체이고, 너무 많은 여성이 대상화의 객체인 것이 문제이다.

변혁은 항상 주어진 시대를 조건 삼아 발아되며 ‘인간의 조건’(아렌트) 속에서 양육되어야 한다. 변혁은 항상 보편성을 지향하지만 수명이 짧은 인간은 특수한 역사의 질곡을 마주해야 한다. 민주주의도, 북한 핵문제도, 반자본주의 투쟁도, 디지털 권리 투쟁도, 환경운동도 저마다 변혁의 보편성과 역사의 특수성이 충돌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페미니즘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넓은 호흡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끼리의 싸움”은 덜 소모적이고 덜 파괴적이며 더욱 생산적일 수 있지 않을까? 목하 진행 중인 페미니즘 혁명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풍부해지길 바라면서 적는다.

기자명 박경신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