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지난 5월24일 연세대 총여학생회가 주축이 되어 마련한 은하선 작가의 강연이었다. 이를 두고 연세대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은 작가는 ‘남성 혐오’를 조장하는 인물이며 십자가 모양 딜도(자위 도구)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주장이 주요 반대 논리였다. 이들은 은 작가와 강연 주최 측 모두를 극단적 페미니즘 세력으로 규정했다. 강연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고, 강연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주최 측은 은 작가의 강연은 공개 강연이며, 강연 내용에 대한 반대 토론도 강연장 내에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유로 예정대로 행사를 진행했다.
추진단은 총여학생회로 인해 인권 사각지대가 생긴다며, 총여학생회를 학생인권위원회로 바꾸고, 참여 구성원도 여학생에서 모든 학생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사실상 총여학생회 폐지안이다. 총여학생회는 결사권과 자치권을 가진 선출 기구다. 여학생에게만 선거 및 투표 권한이 있는 만큼, 남학생이 폐지 또는 개편한다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추진단의 ‘서명 규모’는 빠르게 확대됐다. 하루 만에 2000명 넘는 인원이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온라인에서는 “남학생이 내는 학생회비가 총여학생회 운영에 쓰인다”라는 주장이 전면에 등장했다. 학생회 예산은 본래 학생 사회 내 다양한 목소리를 지원하기 위해 분배되지만, 이런 명분은 통용되지 않았다. “우리도 돈 냈으니 총여학생회의 존폐를 논할 수 있다”라는 주장으로 옮겨갔다.
추진단은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언어’를 선점한다. 특히 절차와 정당성이라는 개념은 이들에게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추진단이 5월25일 발표한 입장문을 보면 “(우리는 이번 문제를) 학생 사회의 의결 절차 및 민주적 정당성에 관한 문제로 인식한다”라고 규정했다. “앞으로 대화를 인권운동 문제로부터 명확하게 분리하여 민주적 의결 구조 위주로 논의할 것을 총여학생회에 요구”한다는 대목도 이들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혐오·차별·인권 같은 추상적 논쟁 대신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기계적 잣대가 우선한다는 주장이다.
다수의 중앙운영위원은 명문화된 ‘총투표 요건’을 충족하니 중앙운영위가 총투표 안건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는 논리를 견지했다. 몇몇 위원이 “그럼 사회대와 문과대 서명만 모아오면 공대 학생회를 재개편하자는 학생총투표가 열릴 수 있다는 거냐”라며 반박했지만, 대다수 위원들은 학생 다수가 모아온 의견을 묵살할 수 없다는 데 방점을 두었다. 총여학생회 개편안에 반대하는 이들이 총투표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추진단을 비롯해 총여학생회 개편을 요구하는 이들은 오히려 ‘참여 민주주의’ ‘소중한 투표권 행사’ ‘민주주의 절차 준수’ 같은 논리로 투표 독려운동을 벌였다. 결국 투표율은 50%를 넘겼고, 목적을 이룬 추진단은 6월15일 활동 21일 만에 자진 해산했다.
개표 이후 ‘재개편 절차’ 두고 논쟁도
추진단은 그동안 온라인상에서 부유하던 ‘총여학생회에 대한 반감’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왜 굳이 총여학생회가 필요하냐는 질문은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동일하게 제기됐다. 총여학생회의 존치를 지탱해온 당위성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성평등·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자치 기구가 여전히 학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을 구분 지으려는 일부 남성의 시각은 총여학생회를 ‘은하선과 비슷한 수준의 논의를 벌이는 이들’로 규정했다. 추진단이 등장한 5월25일부터 총여학생회는 ‘남자가 돈을 내지만 정작 나쁜 페미니즘으로부터 잠식되고 마는 일종의 적폐 단체’라는 프레임이 통용됐다.
연세대 총투표 사태는 이런 일부 남성들이 직접 조직화에 성공하고 다수를 확보해 정치적으로 제도를 뒤엎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성평등을 ‘인권’으로 희석하고, 폐지를 ‘개편’으로 내거는 방식은 연세대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김영희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소장(국어국문학과 교수)은 “백래시는 표면적으로 혐오와 반격의 뉘앙스를 풍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때때로 인권·민주주의·평등·효율성·절차적 공정성 같은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개표 다음 날인 6월16일, 연세대 중앙운영위는 재개편 절차 역시 어디까지나 총여학생회 구성원인 여학생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개표 결과만 놓고 보면 연세대 총여학생회의 운명이 모두 결론 난 듯하지만,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에 총여학생회 폐지를 주장했던 일부 학생들은 중앙운영위의 결정이 자신들의 뜻을 왜곡했다며 비난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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