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빗소리를 들었다. 장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은 근사하다. 야근하고 운동하고 지친 몸을 버스에 싣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알 수 없는 상념에 젖어 밤바다를 생각했다. 자연의 힘이다. 때때로 우리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인간이 가진 한계를 가늠한다. 인간은 자연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비(非)상상의 존재이다. 자연은 인간을 자연스레 상상의 동물이게 한다. 차창에 송골송골 맺힌 빗방울을 보다가, 창밖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지다가 누구나 한 번쯤 해봄 직한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지금 타고 있는 버스가 ‘우리 집’이 아니라 ‘우리의 바다’로 향했으면 싶었다. 그런 생각의 진앙 아래에 생활하며 쌓인 고단함이 없을 리 없다. 피곤한 자일수록 생각이 많다. 아침에 잠깨어 어제는 없었던 선을 발견하고 다른 면(面)을 보는 사람은 꿈에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마침 내 앞에 앉은 이가 머리를 창문에 대고 곤하게 잠에 빠진 걸 보자니 저이의 꿈에 파도 소리가 없을 리 없겠다는 마음. 내려야 할 곳이 있기에 어설픈 잠에 빠져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지친 사람이 이 버스에만 해도 열둘이다. 내려야 할 곳을 정하지 않았기에 종단 열차를 타고 고독할 줄 알던 이의 심정을 노래한 시인도 있었다. 그 쓸쓸한 이도, 시인도 심야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남몰래 음악의 볼륨을 낮춰본 자이리라.
 

ⓒ시사IN 신선영두 개의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선 당신은 기쁘다. 이 비가. 

문득, 이국에서 과묵히 투병 중인 한 시인이 떠올랐다. 수년 전에 딱 한 번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인 그 사람의 얼굴이 차창 사이로 어룽졌다. 그의 시집 속에서 한 편의 시를 골라 한 사람에게 연서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그 시는 처연한 것이었으나, 그때는 어렸으므로 처연함에 끌렸다. 시인의 병중 소식을 들은 후부터 나는 종종 잠시 스치듯 보았던 그 시절 시인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선명하면서도 흐릿한 얼굴. 병중에 마음을 다잡아 씩씩해지는 사람과 병중에 마음이 약해져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시인의 허상은 전자에 가까우나 시인의 본질은 후자에 있다. 오로지 그런 사람만이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이라는 언어를 쓴다. 슬픔이라는 자연 앞에서 인간의 말은 자의적이지 않다.

심야 라디오 방송의 철 지난 대중가요가 버스에 낮게 울려 퍼졌다. 밤에는 어째서 산보다는 바다가 먼저 떠오르는 걸까. 나는 그렇다. 밤에 산에 가고 싶어지는 자와 바다에 가고 싶어지는 자의 심정은 같은 듯 다를 테다. 밤의 산을 생각하는 사람이 무덤에 더 가깝다. 무덤에 가까운 마음은 어떤 것일까.

다친 마음을 스스럼없이 내보일 수 있는 자

한 축구선수는 경기 직후에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마음을 좀 다쳤어요”라고 답했다. 다친 마음을 그토록 스스럼없이 내보일 수 있는 자의 몸은 건강한 것이다. 그런 그의 앞으로 날아와 깨진 달걀은 어떤 몸과 마음을 대변하는 으깨짐인지. 나 역시 ‘해도 해도 너무 못하네’ 하고 내뱉었던 욕지거리를 주워 담고 싶었다. 대체로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하지만 주워 담을 수 있는 말도 있다. 반성하는 말은 내뱉는 말임과 동시에 주워 담는 말이다. 다짐하는 말도 나옴과 동시에 들어간다. 반성과 다짐을 계속하는 사람이 결국 이룩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이유는 말이 그 자신 안에 켜켜이 쌓여 기둥을 이루어서다.

버스가 ‘댄스스포츠’라고 적힌 현판 앞에 정차하자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의 대화가 들릴 듯 말 듯 들려왔다. 두 개의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선 당신은 기쁘다. 이 비가. 그러나 폭우에 피해를 본 이들의 사연을 전하며 디스크자키는 비의 운치를 취소하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자연의 소리 덕분에 일상의 소음과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차는 침묵은 이렇게 동심원처럼 번지고 번져 나간다. 빗소리가 소리 없이 제법 넓어진 밤이었다.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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