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교도관’으로 퇴직한 뒤 ‘민주 경비’로 인생 2막을 살고 있었다. 한재동씨(71). 지난해 개봉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에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의 실제 모델이다. 그는 2004년 교도관을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출근한다. 근무처는 경비실. 그를 만나 ‘1987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부터 물었다.
“부영이 형이 자료를 넘겨주면서 ‘재동아, 일이 잘못되면 큰일 난다. 발각되면 너나 나나 죽을 수도 있어.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했다. 긴장은 되었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교도관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
한재동 교도관이 ‘부영이 형’과 인연을 맺은 때는 1976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대변인 이부영 해직 기자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다. 한 교도관은 이부영 기자와 대화를 나누며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에도 둘은 구치소에서 교도관과 재소자 신분으로 만났다. 호칭부터 달라져 있었다. “번”이라는 공식 호칭보다 “부영이 형”이 더 익숙했다. 한 교도관은 ‘부영이 형’을 따르며 옥중 생활의 편의를 봐주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교도관들도 재소자를 상대로 고문을 많이 했다. 경찰이고 검찰이고, 중앙정보부고 안기부고 조사할 때 반은 죽여놓는 방식을 뻔히 아니까 우리는 애초부터 경찰 발표를 100% 안 믿었다.”
이부영 사무처장은 고문 경관 2명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재동 교도관에게 정보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이 사무처장은 안유 보안계장, 소영환 교도관에게도 똑같은 부탁을 했다. 당시 수감 중인 두 고문 경관은 구치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거부하고 잠도 못 자는 등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전두환 정권이 자신들을 감옥에서 감쪽같이 죽이는 방법으로 진실을 묻어버릴까 봐 공포에 떨었다.”
특히 강진규 경사는 고문에 직접 가담한 다른 경찰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불안해하는 강 경사를 달래 박종철 고문치사 가담자 이름과 역할, 고문 장소 약도 등 주요 증거를 파악하는 일은 소영환 교도관이 맡았다. 소 교도관은 강진규 경사를 안심시킨 뒤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설득했다. 소 교도관은 강 경사로부터 편지지 5장, 앞뒤로 10쪽 분량의 자필 경위서를 받아냈다. 또 두 고문 경관을 면회 온 경찰 간부는 1억원이 입금된 통장을 보이며 회유했다. 면회에 입회한 안유 보안계장이 이 장면을 포착했다.
‘민주 교도관’들이 파악한 진실은 이부영 사무처장에게 전달되었다. “1987년 2월23일 부영이 형이 나를 불러 종이와 펜을 넣어달라고 했다. 드디어 그날이 온 걸로 짐작했다.” 재소자에게 필기구와 종이 소지가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볼펜하고 책상 위에 놓인 영등포교도소 근무용지 한 장을 뜯어서 급히 넣어드리니 다음 날 오후 조용히 오라고 했다. 다음 날 쉬는 시간에 찾아갔더니 빼곡히 쓴 편지를 넘겨주며 보안을 신신당부하고는 김정남씨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아 ‘파면’당하기도
한재동은 1971년 4월 교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입직 초기부터 교도소 내 고질적인 부조리를 목격했다. 침묵하지 않았다. 젊은 교도관은 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교정 간부들로부터 ‘꼴통 교도관’으로 일찌감치 찍혔다. 시련은 첫 부임지인 수원교도소에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근무 중 행형법과 형사정책 등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교도 행정에 필요한 책을 읽은 게 뭐가 잘못이냐?”라고 따지는 그에게 교도소장은 시말서(경위서)를 요구했다. 그는 시말서와 함께 교도소 내 부정·비리와 잘못된 관행 18가지를 첨부해서 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면 결정이었다. 그가 파면 무효를 주장하자 교도소장은 파면 처분을 취소하는 대신 대전교도소로 보냈다. “대전교도소 앞 하숙집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지냈는데 학생들이 보던 〈씨의 소리〉를 나도 읽었다. 유신체제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동료 교도관 중 생각이 비슷한 이들과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젊은 교도관들과 논의해 구속된 학생들과 재야인사를 돕는 길을 모색했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수감된 김대중, 함세웅, 문정현 등을 그는 알게 모르게 도왔다. “재소자 옷에 붙은 노란 딱지는 긴급조치 위반자, 빨간 딱지는 보안법 위반 사범이었는데 우리는 일부러 노랑과 빨간 딱지를 단 수형자만 만나서 친하게 지내며 음식과 책을 넣어주고, 시국에 대해 이런저런 고견을 들었다.”
검찰은 사표 또는 구속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는 구속을 택했다. 이때 함세웅 신부가 나서서 유현석 변호사를 그에게 소개했다. “검사가 반성문을 요구하기에 잘못한 게 없다고 끝까지 버텼더니 자기가 대신 써와서 지장만 찍으라고 하더라. 구속된 지 30일 만에 풀려났다.”
법무부는 “교도관이 상사에게 대들었다”라며 하극상을 이유로 그를 파면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교도소에서 쫓겨난 그는 행정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였던 1981년 가을 마산교도소 교도관으로 복직했다. 유신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함세웅 신부 주례로 이촌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복직한 한재동 교도관은 다시 뜻이 맞는 교도관들과 함께 ‘수석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인사들을 가둔 교도소에 근무하지만, 잘 다듬어진 수석처럼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아가자는 뜻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87년 김승훈 신부가 날린 ‘비둘기’는 거대한 날갯짓으로 6월 항쟁을 일으켰다. 민주화 물결이 사회 곳곳으로 번져갔다. 하지만 교도소 민주화는 더뎠다. 한 교도관은 또다시 교도소 내 부패 개혁 운동에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1989년부터 언론에 교도소 부조리 실태가 잇달아 보도되었다. 그가 언론에 날린 ‘고발 비둘기’가 기사화된 것이다. “1989년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조사를 나왔다. 신문과 방송에 제보한 게 수석회라고 의심해 제보자를 색출하려 했다. 당시 방송사 기자와 직접 인터뷰를 하며 얼굴은 안 나오게 한다고 해서 응했는데 위에서는 다 알더라. 그래도 조사는 별일 없이 마무리됐다. 법무부 한 간부가 ‘한재동을 조사하게 되면 오히려 교도 행정에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서 받아들여졌다고 하더라.”
6월 항쟁 이후 한 교도관은 박종철군 부모도 만났다. “말없이 전화번호만 건네주는데 자식을 그렇게 보낸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이 느껴져 가슴 아팠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실 규명에 공헌한 그와 민주 교도관들의 활동은 오랫동안 비밀로 남았다. 현직 교도관 신분을 고려해 보안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2004년 12월 그는 정년퇴직했다. 2007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주화 운동을 헌신적으로 도운 공로로 감사패를 수여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린 그와 안유 계장 등의 사연은 2012년에야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2012년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마당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모식에 그는 ‘부영이 형’, 안유 계장과 함께 참석했다.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모식에서 조국 교수(현 청와대 민정수석)가 사회를 봤다. 조 교수가 박종철 열사의 진실을 알렸던 주인공들이라며 부영이 형하고 안유 계장, 나를 소개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취재진과 함께 박종철 열사가 숨졌고, ‘민주 교도관’으로 처음 얼굴을 드러냈던 바로 그곳을 찾았다. 경찰청 인권센터로 경찰이 관리해온 이곳은 내년에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뀔 예정이다. 행정안전부는 경찰청으로부터 관리권을 넘겨받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에 관리를 맡긴다. 한재동씨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인권기념관이 들어서면 경비원이 되든 자원봉사자를 하든 소중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알리고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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