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는 고향인 함경남도 장진군 인근에서 다녔어. 부모님이 가게를 했어. 가난하지는 않았어. 아버지가 나를 선생 시킨다고 고향에서 100리나 떨어진 북청사범학교에 보낸 거예요. 기숙사에서 지내며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2학년 때 6·25가 터졌지. 우리 식구는 부모님, 오빠, 여동생 두 명, 남동생 한 명이야. 그때 오빠는 함흥에서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지. (1950년) 7월12일 오빠 졸업식 날이었나 봐. 오빠가 기숙사에 있는 나한테 엽서를 보냈어. 7월13일 전쟁에 끌려간다고. 그 편지를 본 순간, 엄마 생각이 난 거야. 나까지 전쟁에 끌려가면, 엄마가 병들어 돌아가시겠다 싶었어. 북청에서 고향까지 도망을 간 거지. 고향에 갔는데 내가 전쟁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집으로 온 게 마음에 걸렸어. 중학교 친구의 사촌 오빠 도움으로 남쪽으로 피하기로 했지. 잠깐 다녀올 것으로 보고 나 혼자만 넘어왔어. 그때 엄마가 울면서 나 시집보낼 때 쓰려고 마련한 예단을 주더라고. 그때 난 철이 없었지. “금방 올 건데, 짐 되게 어디를 가져가”라고 짜증을 낸 거야.
아마 어머니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을 거 같고, 오빠도 돌아가셨겠지. 동생 세 명은 살아 있을 거 같아. 막내 여동생이 살아 있으면 일흔 살이 넘었을 텐데. 북청에서 공부하느라고 동생들을 자주 못 봤어. 지금도 후회되는 게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걸 왜 타지로 가서… 언니 누나가 돼서 그 애들 한번 안아주지도 못하고. 계속 떨어져 지내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나. 헤어질 때, 여섯 살짜리 남동생하고, 네 살짜리 여동생은 살아 있겠거니 하지. 내가 올 때도 요만하더라고.
1992년에 친구 권유로 처음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어. 내 친구도 북한에서 나왔지. 걔는 친척들하고 남으로 넘어왔어. 5년 전인가 통일부에서 영상편지도 찍었지. 그 영상편지 찍을 때 남편은 아파서 누워 있었고. 남편도 북에서 왔어. 그래도 남편은 가족들하고 다 같이 넘어왔지. 남편은 병을 앓다, 몇 년 전에 먼저 갔어. 50년간 옷 수선을 했어. 영상편지 찍을 땐 다 기억했는데, 지금은 잊어버렸네. (본인의 영상편지 앞부분을 보여주자) 이 영상편지를 북한으로 보낼 수 있을까? 이걸 보내면 동생들 생사 확인은 되는데….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린 8월20일 유춘희 할머니(86)를 만났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를 보았다. “8월20일 월요일 첫 소식입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오후 3시부터 시작됐습니다. 긴 세월을 돌고 돌아 만난 가족들은 눈물로 상봉했는데요, 취재기자 연결해서 현장 소식 알아보겠습니다.” 유 할머니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렇게 휠체어 타고 젊은 사람들 고생시켜가면서도 몸 안 좋아도 가는 게, 그 사람 심리를 생각해보면, 마지막인데 가야지 저 사람도 마지막 길인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유 할머니의 둘째 딸이었다. 유 할머니가 기자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엄마가 걱정돼서 전화했어요. 엄마는 알츠하이머병 판정을 받았어요. 북한에 살았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시죠. 너무 디테일하게(자세히) 말씀하세요. 저는 수백 번도 더 들었어요. 아마 엄마는 그때 기억만 생생하게 남아 있는 거 같아요. 혹시 바로 이산가족 상봉 현장인 금강산을 갈 수도 있으니까 엄마 통장에 남아 있는 돈도 찾아놓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통일부 이산가족 현황 자료에 따르면 신청자 총 13만2603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망하고 5만7059명만 남았다. 이 가운데 60% 이상이 80세 이상이다. 통일부에서는 2013년부터 이산가족의 영상편지를 제작해오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영상편지는 유언처럼 남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온 지 67년이 되었지만 자신이 살았던 마을 약도를 생생하게 그리는 유 할머니.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할머니는 다시 고향에 남은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언니 노릇을 못했어. 못할 수밖에 없잖아. 그 나이에. 내가 혼자 살려고 나왔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나. 딸들이 이제 재봉틀은 버리라고 하는데, 죽어도 못 버리겠다고 그랬지. 그건 나중에 동생들 만나면 뭐 만드는 데 쓸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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