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지 두 달이 되도록 비핵화 작업이 만족할 만큼 진전되지 않았다고 보는지, 트럼프 행정부의 발걸음이 부쩍 바빠졌다. 북한은 핵실험장 폐쇄, 미사일 시험 중단 및 발사 기지 해체, 미군 유해 송환 등 일련의 선제적 비핵화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 등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요구 중이다. 이런 가운데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8월19일 ABC 방송과 인터뷰하면서 “폼페이오 장관이 곧 평양을 방문하며,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도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조만간 이뤄질 폼페이오 4차 방북의 성패는 북·미 양측의 주고받기에 달려 있다. 북한이 요청하는 종전선언과 미국의 요구 사항인 핵 신고서 제출이 어떻게 교환되느냐가 관전 포인트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이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에 성의를 보일 경우 폼페이오 장관에게 핵탄두 정보는 물론이고 핵무기, 핵시설 장소까지 포함된 신고 리스트를 넘겨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리스트가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는지 여부는 신고 내역을 받아봐야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폼페이오 장관이 김 위원장을 만나면 북한의 핵 포기 방식과 시기 등 구체적 비핵화 로드맵과 함께 종전선언 문제에 관한 실질적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논의가 성공적으로 진전되면 10월 중에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가시권에 들어올 전망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8월20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말한 것은 유의할 만하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장소는 정치적 상징성과 비중을 감안할 때 백악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

ⓒAP Photo7월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평양의 백화원 영빈관에서 회담을 시작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비핵화에 가속페달을 밟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6·12 정상회담 이후 미국 내에서 점증해온 비판 기류 때문이다. 비판의 초점은 북·미 정상회담 합의에 구체적 비핵화 시간표가 빠져서 알맹이가 없는 데다, 미국이 너무 양보했다는 것이다. 지난 7월 초 평양을 찾은 폼페이오 장관이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귀국(3차 방북)한 뒤 여론의 비판 수위는 한층 높아진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 처지에서는 미국 내 정치 일정 때문에라도 가시적 성과가 시급하다. 그는 오는 11월6일 연방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분의 1을 새로 뽑는 의회 중간선거와 주지사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만일 현재 상·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민주당에 패하면 트럼프의 국정 전반에 차질이 불가피한 데다 재선 가도에도 적신호가 켜진다.

전통적으로 미국에서는 외교 현안이 선거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직후 북핵 문제를 최대의 국가안보 이슈로 설정한 데다, 지난해 하순 북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을 의미하는 ‘코피 전략(bloody nose)’을 세우는 등 북한과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북·미 양국이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며 전쟁 위기를 넘겼고, 북핵 문제도 상당수의 일반 미국 유권자들에게 큰 관심사가 되었다. 지난해 1월 취임 후 이렇다 할 국내 치적이 없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해결 혹은 진전을 중간선거 호재로 삼고, 덤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7월 중순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관리들을 두루 만난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시사IN〉과 인터뷰에서 “최근 워싱턴 방문을 통해 관찰한 결과 미국 측은 종전선언을 고려할 용의가 별로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는 8월13일 한 강연 당시 “현재 남북 간, 북미 간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종전선언은 너무 이른 것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폼페이오 장관이 지난 7월 3차 방북 때 북한에 핵 신고서 제출을 요구하면서 ‘비밀 핵시설’ 문제까지 제기했을 가능성이다. 〈노동신문〉은 8월18일자 논평에서 “(미국의) 대화 반대파들은 날조된 ‘북조선 비밀 핵시설 의혹설’로 협상팀에 몽둥이를 쥐여주고 회담 파탄으로 내몰았다”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그리피스 대학 앤드루 오닐 교수도 8월19일 〈재팬 타임스〉와 인터뷰하면서 “미국은 16년 전 벌어진 일을 상기시키며 북한 측에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비밀 핵 및 미사일 활동 문제를 제기했을 개연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2002년 10월 당시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만나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북한의 추가 핵 개발 증거를 제시했다. 지난 7월 3차 방북 당시 폼페이오 장관이 북측에 어떤 증거를 제시했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북한은 폼페이오 장관 귀국 직후 미국이 종전선언은 외면한 채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선(先)비핵화를 요구했다”라면서 맹렬히 비난했다.

미국이 선뜻 응하기 쉽지 않은 종전선언

ⓒAFP PHOTO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만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위는 6·12 북·미 정상회담 모습.

사실 종전선언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상징이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뜻 화답할 수도 있다. 미국 처지에서 그다음 순서 때문에 종전선언에 응하기가 쉽지 않다. 종전선언 이후 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주한 미군 2만8500여 명의 지위 변경으로 이어진다. 주한 유엔군 사령부의 법적 지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추이를 보아가며 종전선언 문제를 고려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종전선언 없는 미국의 비핵화 조치 요구를 ‘강도적 요구’라고 규정한 만큼 폼페이오 장관이 조만간 방북한다면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타협안을 준비할 가능성이 크다.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 분석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는 〈시사IN〉과 인터뷰하면서 “북측과 타협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폼페이오가 또다시 북한을 방문할 리 없다. 내가 듣기론 북한이 핵 신고 목록만 제출한다면 그 첫 단계가 부분적 비핵화라고 해도 미국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일부 전문가들은 돌파구 마련을 위해선 결국 북·미 양측이 한 발짝씩 양보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란코프 교수는 “부분적이나마 대북 제재를 푼다면 북한의 의미 있고 비가역적인 비핵화 양보를 끌어낼 수 있다”라며 미국의 신축적 태도를 주문했다. 그는 최근 언론 기고에서 “북한이 원심 분리기 2000~3000개를 포기한다면 유엔안보리가 북한의 석탄 수출 합법화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스탠퍼드 대학의 한반도 전문가 대니얼 스나이더는 〈시사IN〉에 “미국과 북한 모두 현재의 협상 모멘텀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만, 관건은 서로 많은 걸 포기하지 않는 상태로 북핵 방정식을 풀 수 있느냐 여부이다”라고 지적했다.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이 ‘고차방정식’ 해법으로 이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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