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에서 적립금이란 ‘돼지 저금통’과 비슷하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매달 돈을 넣고(보험료 수입) 뺀다(연금 지출). 국민연금의 수입이 많고 지출이 적으면 저금통 안에 돈이 쌓인다. 반대의 경우가 지속되면, 돈이 줄어들다가 결국 고갈된다.

2018년 현재 한국의 국민연금 제도는 이 돼지 저금통(적립금)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가입자들은 자신의 소득 중 9% (보험료율)를 저금통에 넣는다. 은퇴 이후에는 가입 기간의 평균소득 가운데 45% (2018년 현재, 소득대체율)를 연금으로 받는다. 소득대체율은 해마다 0.5%포인트씩 내려(2019년 44.5%, 2020년 44%…) 2028년부터 40%로 고정된다. 가입자들이 자기 소득 중 9%를 넣고 노후에는 40~45%를 빼가니, 연금의 액수는 대체로 은퇴 이전의 소득에 비례한다. 부자일수록 연금도 많다.

ⓒ연합뉴스8월2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위)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가 국민연금 지급을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빈부와 상관없이 국민연금은 가입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금융상품이다. 가입자 전체를 기준으로 따져보면, 평균적으로는 은퇴 이전에 납부한 금액의 2배 정도를 연금으로 받게 된다. 수십 년에 걸쳐 1억원을 보험료로 내면 은퇴 이후 사망할 때까지 연금 2억원을 수령하게 된다는 의미다. 수익비(납입 보험료 대비 연금 수급액의 비율)가 2배다. 다만 국민연금은 소득재분배 기능이 작동하기 때문에 수익비로 보면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이익이다. 20년 가입자 기준으로, 최저 소득층은 보험료의 7~8배, 최고 소득층은 1.4배 정도를 노후에 받는다. 가입자의 높은 수익비는, 국민연금의 사업 목표가 이윤이 아니라 복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민간 개인연금 상품의 수익비는 1배를 넘기 어렵다.

‘가입자에게 유리한 상품’이라서 생기는 문제

문제는 국민연금이 가입자에게 유리한 상품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가입자의 소득 가운데 9%를 받지만 40~45%를 돌려줘야 한다. 9만원을 아무리 잘 운용해도 40만~45만원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결국 저금통(적립금)에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적립금은 언젠가 반드시 바닥나게 되어 있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1988년에 출범했다. 이제 30세인 ‘젊은 연금’이다. 국민연금의 어린 시절엔 젊은 가입자들이 내는 보험료가 적립금으로 차곡차곡 쌓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젊은 노동자들이 늙으면서 적립금에서 나가는 돈이 많아지다가 결국 고갈된다. 이때부터는 ‘저금통 없는 국민연금’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해당 시기의 젊은이들이 보험료를 내서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부과 방식’. 실제로 한국보다 100년 정도 일찍 국민연금을 출범시킨 독일(1889년), 영국(1908년) 등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적립금이 고갈되어 부과 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연합뉴스8월17일 ‘국민연금 공청회’에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소속 회원들이 국민연금 지급 보장 명문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국민연금 적립금의 고갈 자체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인간이 언젠가 사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립금도 반드시 고갈된다. 인간은 자신이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젊은 시절부터 사망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그 계획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삶에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다. 고갈 시점을 예측하고 가급적 이를 늦추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한국의 경우, 국민연금 자문위원회(이하 자문위원회)라는 조직이 5년마다 구성되어 연금 재정이 향후 70년 동안 어떻게 될 것인지 전망한다(장기재정 추계). 그런 추정의 바탕 위에서 ‘적어도 70년 내에는 적립금 고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제도 개선 방향)’을 도출해서 정부와 국민에게 ‘제안(결정이 아니라)’한다. 무려 70년 뒤를 내다봐야 하는 이유는, 대략 20세에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젊은이가 보험료를 내고 연금을 받다가 사망하기까지 70년 걸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70년 뒤인 2088년의 기대수명은 남성 90.8세, 여성 93.4세다.


자문위원회는 2003년을 시작으로 5년마다 국민연금 장기재정을 추계하면서 제도 개선 방향을 제안해왔다. 지난 8월17일 공청회에서 발표된 장기재정 추계는 2003년 이후 네 번째(제4차)로, 지금부터 2088년까지 70년 동안 국민연금 재정의 흐름을 추정해 발표했다.

국민연금의 장기재정 추계는, 우선 지금의 보험료율(9%)과 소득대체율(45→ 40%), ‘연금수령 개시 연령’ 등이 2088년까지 지속된다는 전제하에서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을 추정한다. 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하는 나이는 현재 62세인데, 앞으로 5년마다 1세씩 끌어올려 2033년부터 65세로 고정된다.

국민연금으로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을 계산하려면, 먼저 향후 70년 동안의 출산율·경제성장률·임금상승률·기대수명 등을 예측해야 한다. 들어올 돈이 증가하려면,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가 늘어나야 한다(출산율). 그들의 소득이 높아야 보험료도 많이 낼 것이다(경제성장률과 임금상승률). 반대로 노인이 많아지고 기대수명이 늘어날수록 나갈 돈이 커진다. 자문위원회는 통계청, 한국개발연구원 등 국책 연구기관의 전망을 기초로 출산율 등 변수를 추정하고, 이에 따라 국민연금의 수입·지출을 예측해서 비교한다. 어느 시기까지 어느 정도 적립금이 쌓였다가 줄어들거나 바닥나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자문위원회는 왜 두 개의 안을 만들었나

 


8월17일 공청회에서 발표된 장기재정 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적립금은 올해 671조원으로부터 계속 늘어나면서 23년 뒤인 2041년에 1778조원으로 천장을 친다. 이때까지는 국민연금으로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2042년부터 지출이 수입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적립금이 점차 줄어들다가 2057년에 고갈된다. 5년 전의 제3차 재정추계(2013년) 당시에는 적립금 고갈 시점이 2060년이었다. 3년 당겨졌다. 이는 출산율·경제성장률 등이 제3차 추계 당시보다 더욱 비관적으로 전망되었기 때문이다.

 

 

 

실질경제성장률은 올해부터 2020년까지 3% 선을 기록한 뒤 계속 내려가 2030년대에는 1%대, 그 이후에는 0.5~0.8%일 것으로 예측되었다. 합계출산율(가임 기간 여성이 평생 낳는 자녀의 수) 역시 2020년 1.24명을 기록한 뒤 2030년 이후에도 1.32~1.38명에 머물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 수는 2035년의 1894만여 명을 정점으로 줄어들지만, 국민연금 수급자 수는 2018년 366만9000명에서 2035년 894만8000명, 2065년 1554만8000명으로 급격히 늘어난다. 공청회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은 13.5%이지만 2020년 15.7%, 2040년 32.8%, 2060년 41.0%로 증가해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할 전망이다.

더욱이 2020년대 이후에는 ‘제대로 된 연금’을 받는 가입자들이 크게 증가한다. 지난 5월 기준으로 국민연금 수급자들이 받는 연금은 월평균 39만원 정도다. 그래서 용돈 연금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평균 납부 기간이 12.6년, 월평균 납부액도 9만8000원에 불과하다. 납부 기간이 짧고 납부액이 적기 때문에 연금 역시 용돈 수준인 것이다. 그럼에도 낸 보험료의 4배에 가까운 돈을 받는다. 앞으로 납부 기한인 40년을 꽉 채운 가입자들이 제대로 된 연금을 받게 되면 국민연금의 지출은 크게 늘 수밖에 없다.


적립금이 고갈되면, 부과 방식으로 가야 한다. 연금 전액을 고갈 시점(2057년) 이후 가입자들의 보험료로 충당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고갈 이후 시점에는 보험료 납부자보다 연금 수급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2018년 현재 가입자 2181만8000명에 수급자 366만9000명인데, 2060년에는 가입자 1328만5000명에 수급자는 1706만9000명이다. 부과 방식으로 간다면 2060년의 가입자는 소득의 26.8%(2070년 29.7%, 2088년 28.8%)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 미래의 젊은 가입자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일 터이다.

이제 남은 것은 지금까지의 재정 전망을 바탕으로 ‘70년 내에 적립금이 고갈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4차 자문위원회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연금 개혁 목표를 정했다. 70년 전망 기간 마지막 해인 2088년의 적립금 규모를 같은 해 연금 지출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적립배율(적립금을 지출액으로 나누는 수치) 1배’다.

물론 경제성장률·임금상승률·출산율 같은 경제·인구 지표를 개선할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그러나 경제·인구 지표를 움직이는 것은 매우 어렵기도 하거니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 시점에서 당장 통제 가능한 것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정도다. 가입자들이 더 내고(보험료 인상) 덜 받으면(소득대체율 인하) 된다. 자문위원회는 ‘2088년의 적립배율 1배’를 달성할 수 있는 보험료율을 산정해봤는데 무려 16.02%(2020년 시행하는 경우)였다. 보험료율을 단번에 지금(9%)보다 7.02%포인트 올리면 가입자들은 패닉에 빠질 것이다. 보험료율을 감당할 정도로 높이면서 목표를 달성할 방법은 없을까? 자문위원회에서는 두 가지 대립적인 방안이 제출되었다. ‘가안’과 ‘나안’이다.

 

‘가안’의 가장 큰 특징은, 소득대체율을 2018년의 45%로 유지하는 것이다. 소득대체율은 2028년까지 40%로 내리게 되어 있다. 사실상의 소득대체율 인상이다.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당연히 보험료도 더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년(2019년)에 2%를 더 올리자고 제안한다(보험료율 11%). 15년 뒤인 2034년에 다시 1.31%포인트 붙여 보험료율을 12.31%로 인상한다.

장기재정 추계에 따르면, 보험료율을 단번에 7.02%포인트 높여야 2088년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15년의 간극을 두고 각각 2%포인트와 1.31%포인트 올리는 정도로는 이루기 힘들다. ‘가안’의 이런 제안에는 나름의 철학과 방법론이 깔려 있다. 우선 ‘가안’ 제안자들은 “국민연금 제도에 대한 ‘신뢰’ 형성”을 중시한다. 재정추계가 나오는 5년마다 보험료 인상 논란이 터지고 먼 장래의 기금 고갈로 여론이 들끓는 상황이라면, 시민들이 국민연금을 신뢰하고 보험료를 지속적으로 납부할 수 있을까? 차라리 보험료율 2% 인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후한 소득대체율을 통해 국민연금에 대한 믿음과 호감을 고조시키는 것이 나은 대안일 수 있다. 더욱이 70년이라는 엄청나게 긴 시간을 대상으로 출산율, 경제성장률 따위를 추정하는 것은 너무 불확실성이 크다. 70년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간대다. 비관적 시나리오에 기대어 현재를 희생하는 것(보험료 인상)보다 차라리 출산율과 경제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안’의 제안자들은 미래 추정의 시간대를 30년으로 조정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70년이 아니라 30년째 연도의 적립금이 그해 연금 지출보다 많으면 굳이 보험료율을 올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또한 일정 시기 이후에는 보험료 외에 정부 재정을 국민연금에 투입할 수도 있다.

정부안 10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해 논의

ⓒ시사IN 이명익한국의 국민연금은 1988년에 출범했다.
국민연금 자문위원회가 5년마다 구성되어 연금 재정이 향후 70년 동안 어떻게 될 것인지 전망한다.
위는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나안’은 ‘가안’을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데다 먼 장래를 애써 눈감으며 당장 달콤한 방안만 제출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번 제4차 재정추계를 30년 기한으로 시행했다면, 보험료율을 조정할 필요도 없다. 2040년의 경우, 적립금이 1776조원으로 같은 해 지출(163조원)보다 훨씬 많게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재정이 장기적으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파탄날 수 있다.

‘나안’은 제4차 재정추계의 결과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출산율·경제성장률 등이 개선될 여지가 크지 않다고 본다. 더욱 엄격한 국민연금 재정 관리를 제안하는 이유다. ‘나안’에 따르면, 소득대체율은 현행(45→40%)대로 유지해야 한다. 보험료율은 2019년부터 2029년까지 10년의 이행 기간에 단계적으로 13.5%까지 4.5%포인트 인상한다.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이 65세로 오르게 되어 있는 2033년 이후부터 다시 5년마다 1세씩 올린다. 25년 뒤인 2043년부터 수령 개시 연령이 67세로 고정되는데, 이로써 보험료율을 3.7%포인트 추가 인상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입자들이 이렇게 더 내고 덜 받게 되면, 국민연금이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나안’은 국민연금 이외의 노후소득 보장 수단으로 이미 시행 중인 기초연금(65세 이상의 소득 기준 하위 70% 노인들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제도)과 퇴직연금의 보장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다층체계를 통한 노후소득 보장’이다. ‘나안’ 제안자들은, 국민연금에 정부 재정을 투입할 수 있다는 ‘가안’의 주장에도 격하게 반발한다. 만약 반드시 재정이 필요하다면 국민연금이 아니라 기초연금에 투입하는 것이 사회적 형평성에 맞는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에서는 소득에 따라 연금액이 정해지지만, 기초연금은 거의 모든 노인들에게 비슷한 금액을 지급한다.

자문위원회가 제출한 ‘가안’과 ‘나안’은 제안일 뿐이지 정책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두 방안을 바탕으로 각계 의견과 여론을 수렴해서 9월 말까지 ‘국민연금종합운영계획안’을 마련한다. 이 계획안은 국민연금심의위원회와 국무회의 등을 거친 뒤 대통령 승인을 통해 최종적 정부안으로 확정된다. 정부안은 10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되어 논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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