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비참한 인도주의 위기에 처한 곳은 예멘이다. 그러나 그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멘의 비극을 보아달라는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Oxfam)의 호소다. 이 무관심에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갈등이 끊이지 않는 중동 어딘가에서 분쟁을 겪는 나라 중 하나려니 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제주도에 500명이 넘는 난민 신청자들이 나타나자 예멘은 갑자기 뉴스의 중심이 되었다.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 논쟁이나 이슬람 혐오 논란이 거세지만, 정작 예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전히 우리는 모른다. 내전의 배경은 무엇일까? 누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을까? 그 난민들은 왜 제주도까지 흘러와야 했을까?

예멘은 아라비아반도 남쪽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나라다. 예멘은 반도의 7개 나라 중 유일한 공화국이다. 이웃한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와 오만 등 걸프 왕국보다 선진적인 정치체제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다르다. 늘 불안과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외피는 갖췄지만 종파와 부족들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다 보니 갈등의 골이 깊다. 왕실이 전권을 갖는 걸프 왕국들에 비해 공화국 예멘 정부가 오히려 더 취약했다.

ⓒEPA2017년 1월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 예멘의 시아파 세력인 후티 반군이 정부군을 향해 기동하고 있다.


예멘은 본래 분단국가였다. 사나를 수도로 한 북예멘과 수도가 아덴인 남예멘으로 갈려 있었다. 20세기 냉전 시기에 남예멘은 소련 편에 섰다. 공산 진영이 쇠퇴하면서 남예멘은 기댈 곳이 없어졌다. 소련의 원조가 급감하자 생존이 어려워진 남예멘은 북예멘과 통일 논의에 나섰다. 1990년 5월21일, 예멘은 통일을 선언했다. 그러나 북예멘의 지도자였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주도한 통합은 남쪽 세력에 불리한 결합이었다. 남예멘 출신들은 불만을 갖게 되고 결국 1994년, 통합 4년 만에 1차 내전이 발발했다. 살레 대통령 정부는 5개월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남예멘 잔존 세력을 제도권에서 퇴출시킨 후 1인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2011년 아랍 전역을 강타한 혁명, 이른바 ‘아랍의 봄’은 예멘을 비켜가지 않았다. 국민들은 부패와 폭정을 일삼아온 살레 정부에 반대해 거리로 나섰다. 살레 대통령은 결국 2012년 2월27일 하야했다. 노회한 그는 권력을 놓으면서도 돌아올 여지를 남겼다. 자신 밑에 있던 2인자 아부라부 만수르 하디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한 것이다. 하디는 1차 내전 당시 국방장관으로 살레를 도와 남부 반군들을 소탕한 주역이자 살레의 심복이다. 살레는 언젠가 상황이 진정되면 권토중래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러나 살레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하디는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 국민들에게 자신이 주도하여 부패를 척결하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시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디는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권력을 적절히 분점하는 체제를 구상했다. 2013년 국민대화회의(National Dialogue Council)를 구성해 다양한 정치세력들을 모았다. 2014년에는 예멘 전역을 6개 주로 분할하고 주별로 자치권을 허용하는 연방정부안을 공포했다. 중앙정부의 역할은 유지하되 종파와 부족별로 일정 정도 자율권을 주면서 협치 모델을 만들려 했다.

여기서 사달이 난다. 예멘의 시아파는 전체 인구의 41%를 점유하고 있다. 북부 사다 주를 거점으로 알자우프, 하자 등 3개 주에 주로 분포한다. 시아파는 인구와 세력을 근거로 최소한 2개 주 이상에서 지분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디 정부는 사다 1개 주에서만 시아파의 관할권을 인정했다. 분노한 시아파는 결국 총을 들었다. 2차 내전이다. 시아파 반군은 수도 사나를 점령하고 세를 확장하여 현재 전체 예멘 영토의 4분의 1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예멘의 핵심 지역인 홍해 연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어서 하디 정부군에 비해 전략적으로 우위에 섰다.

 


무력 투쟁에 나선 예멘의 시아파 세력이 바로 후티 반군이다. 후티는 본래 예멘 북부 사우디와 접경한 지역의 가문 이름이다. 이 가문의 유력 인사였던 후세인 바드레딘 알후티가 중심이 되어 냉전 직후인 1990년부터 정치 운동을 시작하면서 후티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졌다.

후티 반군은 시아파의 여러 계보 중 자이디(Zaydi)파로 불리는 다섯 이맘파에 속한다. 9세기 말부터 지금의 예멘 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해온 자이디파는 문화적으로 소극적·폐쇄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은둔과 고립을 즐기는 이들이었지만 남북 예멘 통일 이후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환점은 지도자 후세인이 2004년 살레 정부에 의해 사살되면서다. 이후 무장투쟁을 하는 반정부 정파로 거듭났다. 후세인의 동생인 압둘 말리크 알후티가 반군을 이끌고 있다.

사실 후티의 실체는 국제사회에 비치는 반군의 강성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본래 후티 반군은 하디 정부를 전복하고 시아파 국가로 분리 독립할 의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아랍의 봄 당시 시민들과 함께 혁명에 참여한 여러 정파 중 하나였고, 자기들의 세력에 비례하는 권력을 원했다. 즉 연방정부의 일원으로 제도권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후티 반군의 종파 배경이 되는 자이디파는 시아파 중에서 성향이 온건한 편으로, 교리와 전승에서도 수니파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하디 정부와 권력 협상이 어긋나자 후티 반군은 불평등한 정치에 복종하는 대신 무장투쟁을 택했다. 내전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2014년의 상황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멘 내전은 국제사회가 승인한 유일 합법 정부와 반군만의 싸움이 아니다. 정부군과 반군 외에 두 세력이 내전에 뛰어들어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과거 남예멘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복원하려는 분리주의 계열의 남부운동(Southern movement)과, 테러 집단인 알카에다 아라비아지부(Al Qaeda Arabian Peninsula·AQAP)다.

 

ⓒEPA지난 4월18일 예멘 북부 암란에 있는 한 난민 캠프에서 예멘 난민 어린이들이 임시 텐트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다.


남부운동은 냉전 해체기에 순식간에 일어난 통일로 인해 손해만 보았다고 믿는 분리주의 그룹이다. 이들은 내전 국면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때마침 과거 남예멘의 수도였던 아덴을 중심으로 구세력을 결집시켜 따로 독립하려 한다. 예멘 남부 연안 및 내륙지역에는 석유와 가스 자원이 풍부하므로 굳이 통일 예멘 연방정부에 가담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들이 장악한 아덴은 홍해에서 아덴 만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오는 길목에 있는 도시다. 역시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다.

더 위험한 변수는 알카에다의 발호다. 내전이 격화하고 혼돈이 증가할수록 폭력적 극단주의자들은 쾌재를 부른다. 알카에다 본부 간부를 지낸 나시르 알와하이시를 중심으로 폭력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아덴 근처 남부 지역 및 마리브 동부, 중부 내륙지역에서 빠르게 세를 확장 중이다. 심지어 시리아, 이라크에서 힘을 잃은 ISIS도 예멘으로 침투하고 있다. 현재는 후티 반군과 정부군의 대치 상황 가운데 분리주의 그룹이 일단 정부군 편을 들고 있다. 이 와중에 혼란을 틈탄 알카에다가 차츰 세력을 넓히고 있다.

싸움의 당사자들이 많아서 해결이 어렵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외부 세력의 개입이다. 중동의 패권을 놓고 겨루는 라이벌인 이란과 사우디는 예멘에서 사실상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사우디는 자국 아시르 지방과 맞닿은 예멘 북부 국경지대에서 시아파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사우디는 후티 반군을 이란의 전위부대라고 생각한다. 이란의 수족들이 왕국 턱밑에 포진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2015년 3월25일, 사우디는 12개 국가와 연대해 예멘 폭격에 나섰다. 내전은 이렇게 해서 국제전으로 번졌다.

지상군 경험이 부족한 사우디 주도의 다국적군은 주로 공습에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민간인 피해가 폭증했다. ‘국경없는 의사회’가 운영하던 아브스 지역 병원이 사우디 주도 다국적군 공습으로 파괴되고 19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특히 반군이 장악한 북동부 예멘의 거점 항구 호데이다에 공습이 집중되면서 필수 의약품 등을 하역할 수 없어 콜레라가 발생하는 등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사우디의 예멘 개입을 간접 지원하는 미국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사우디는 후티 반군이 이란과 연계되었다고 보지만, 이란은 이를 부인한다. 예멘 시아파와 이란 시아파의 연대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둘은 많이 다르다. 후티 반군의 다섯 이맘은 이란의 열두 이맘파보다 개방적이고 훨씬 온건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리 성향이 다른 분파라 해도 밖에서 보기에는 어차피 시아파다. 그리고 이란의 흔적이 후티 반군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외치는 구호도 이란과 연대하는 레바논 헤즈볼라와 판박이다. 무엇보다 후티 반군들이 사용하는 로켓 등 화기 일부가 이란산임이 밝혀지면서 이란의 후티 지원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양강의 대리전 와중에 아랍에미리트(UAE)도 기회를 엿보고 있다. UAE는 예멘 남부운동, 즉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면서 사우디와 결이 다른 행보를 하고 있다. UAE는 일단 사우디의 압력으로 반(反)후티 전선에 동참하고 있지만, 향후 상황에 따라 다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본격 지원할 가능성이 크다. 지리적으로 페르시아 만 안쪽에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UAE는 홍해와 아라비아해에 진출할 거점을 원한다. 사우디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예멘에 개입했다면, UAE는 향후 걸프를 나와 예멘 앞바다인 아덴 만, 아라비아해, 홍해 등으로 진출하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결국 예멘 내전의 배후에는 역내 패권 경쟁이 있다. 중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양대 강국, 사우디와 이란이 충돌하는 전장이다(〈시사IN〉 제571호 ‘사우디와 이란, 그 싸움의 이면’ 기사 참조). 이 중동의 핵심 갈등 축이 작동하는 가운데, UAE 등이 나름의 입지 확장을 노리며 개입한다. 사우디는 하디 정부군을, 이란은 후티 반군을, UAE는 남부 분리주의 세력을 각각 밀고 있으며, 알카에다에는 인근 극단주의자들이 개별적으로 가담하며 몰려들고 있다. 후티 반군은 사우디 본토와 홍해를 항행하는 사우디 유조선에 미사일을 쏘고, 사우디 주도의 다국적군은 호데이다를 봉쇄하고 무차별 공격을 하고 있다. 서방 부대들도 드론 공격 등으로 다국적군 지원 역할을 한다.

각자가 정치적 이익에 매달려 이전투구하는 사이 죄 없는 민간인들은 비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700만명이 기근에, 100만명이 콜레라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200만명이 넘는 피란민들이 집을 떠나 떠돌고 있다. 지난 4년간 1만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다. 지옥도다.

후티 반군을 파트너로 편입시킬 방법 없나

상황이 얽히고 꼬여 있기에 그만큼 풀기가 어렵다. 유엔사무총장 예멘 특사로 임명된 마틴 그리피스가 나섰다. 목표는 일단 후티 반군이 사우디에 대한 도발을 멈추고 이란 지원과 상관없음을 밝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후티 반군이 향후 예멘 정치의 일원으로 편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 목표를 이루려면, 후티 반군에 대한 압박과 제재를 규정하고 무장 해제 요구가 강경하게 담긴 유엔안보리 결의안 2216(2015년 4월)을 갈음하는 새 결의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조금씩 상황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미국도 인도주의 위기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우디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최근 사우디도 무고한 민간인 오폭을 인정하고 책임 규명을 하겠노라 밝혔다.

1990년 이후 예멘은 두 번의 큰 희망을 품었다. 첫 희망의 순간은 통일이었다. 지정학적 요충지인 예멘이 하나로 뭉치면 이웃 산유 왕정 국가들 못지않게 도약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하지만 생각과 이익이 각기 다른 부족과 종파들을 하나로 엮어낼 리더십이 없었다. 희망은 금세 사라졌다. 통일 4년 만에 내전이 발발하고 1인 독재로 전락했다.

두 번째 희망은 아랍의 봄이었다.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2012년의 혁명이었다. 혁명은 2년 만에 다시 내전으로 귀결되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 사람들이 꿈꾸며 바라는 통일도 민주주의도 모두 덧없게 되었다. 정체성의 차이와 경제적 격차를 다루어낼 역량과 의지 없이 하나로 합했을 때 통일은 오히려 비극의 전조였음을 깨달았다. 독재자를 축출하고 민주주의를 꿈꿀 때 이 희망을 하나로 엮어낼 지도력과 합의의 정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전보다 더 참혹한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보았다. 예멘에서 내전은 더 나은 정치체제를 꿈꿀 희망을 잃게 만들었다.

모든 전쟁은 상흔을 남긴다. 여느 전쟁보다 특히 내전의 상처가 더 깊고 여파는 더 길다. 싸움을 멈춘 후, 국경 밖 타자(他者)는 마주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한 울타리 안에서 갈등과 분쟁의 기억을 갈무리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내전의 당사자들은 다르다. 시간이 흐른 후 이 참상이 혹 진정될 수 있다고 해도 반복되는 내전을 경험한 예멘 사람들은 마냥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또 다른 내전의 비극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계속 하나의 예멘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답은 예멘인들 스스로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함께 찾아내야 할 과제인지도 모른다.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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