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31일, 아빠의 페이스북에는 무심하게 떠오른 누군가의 생일 때문에 가슴을 치고 눈물 바람을 하는 분들로 가득했단다. 그날은 한 달쯤 전 돌연 우리 곁을 떠난 노회찬 의원의 생일이었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어. “한 달이 넘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일을 어떡하지? 노회찬 의원에게 가보자’ 하고 일어선 뒤에야 당신이 돌아간 걸 깨닫고 엉거주춤 주저앉습니다.” 사실 아빠도 그렇다. 드루킹인지 뭔지 하는 쳐다보기도 싫은 ‘정치 자영업자’와 얽힌 책임을 지고 스스로 세상을 버린 노회찬 의원을 두고 아빠 친구는 “송충이 한 마리가 금강송을 잡아먹었다”라고 표현했지. 아빠는 지금도 높다란 금강송이 만들어준 그늘 아래 있는 것 같고, 무성한 잎사귀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내는 싱그러운 소리들이 귓전을 간지럽힐 것 같다.

ⓒ윤성희7월27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회찬 의원의 빈소.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한국의 진보’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어. 그중 한 장면을 아빠는 선명히 기억해. 한 남자가 능숙한 솜씨로 용접을 한다. 용접 마스크를 벗었을 때 아빠는 웃음을 터뜨렸지. 유머와 촌철살인의 일침을 구사하던 초선 의원 노회찬이 헤벌쭉 웃으며 등장했던 거야. 노회찬은 대학 졸업장 받기에 앞서 용접공 자격증을 땄어. 그는 지하철 2호선을 탈 때마다 감개무량하다고 했지. 자신이 용접한 철제 빔들이 묻혀 있을 거라고. 

‘한국의 진보’를 보면 별안간 노동 현장에 등장한 ‘학출’, 즉 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회고가 나와. “결정적으로 일을 참 못했다. 일을 참 못해서 두고 보면 다 (학출로) 만나게 되더라”는 것이지. 노동자가 되겠다고 현장에 뛰어든 이들은 많았지만 그들 가운데 진짜 노동자로 변신한 사람은 드물었다는 얘기야. 어쩔 수 없는 간격이었지. 노회찬은 그 ‘어쩔 수 없음’이 싫었고 현장에 가기 전 용접 자격증을 먼저 땄던 거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 잘하는 노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 더, ‘한국의 진보’에서 한 ‘학출’은 이렇게 토로하더구나. “말하는 게 어려웠다. 노동자의 언어를 구사하는 게 어려웠고 또 무슨 말을 하면 내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두려웠다”고 말이야. 그건 현장에 뛰어든 학생 모두의 문제였을 거야. 화제가 다르면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지는 법이고, 집단에 따라 사용하는 어휘의 개수는 물론 심지어 사용하는 욕설조차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니까 말이야. 학생 출신 초보 노동자들은 일단 노동자의 ‘말’부터 배워야 했어.

하지만 노회찬은 일 잘하는 노동자이면서 말 잘하는 노동자이기도 했어. 격무에 지친 노동자들의 귀마저 끌어당길 만큼 재미있고 어려운 개념도 쏙쏙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었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어. “생존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노동운동 할 때, 노동자들이 신참인 내 말을 듣기나 하나요. 정당을 만들고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책을 길거리에서 설명할 때 30초도 길어요. 그 이상은 안 들어(〈시사IN〉 제568호 ‘우리 옆의 노회찬은 이런 정치인이었습니다’).” 그의 설명처럼, 촌철살인의 언어 감각은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인 것이었고 원래부터 빛났다기보다 갈고닦아 빛을 낸 것이었어.

그는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던 과거를 돌이키며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 “용접공이 된 것은 우리 사회가 빨리 안 변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예상보다는 더 빨리 민주화가 왔다(〈시사IN〉 제512호 ‘선거구제 개편 놓고 민낯 드러날 것’).” 일반적인 운동권 출신이라면 “용접공이 된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였다”라고 인터뷰했을 것 같구나. 누구나 자신의 행동이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노회찬은 역사 앞에 겸손했어. 평생 노동자로 살면서 더디게 변하는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언제는 안 힘들었습니까?”

ⓒ시사IN 포토고 노회찬은 생전에 북극곰 등 멸종위기 동물을 살리자는 취지의 명함을 쓰기도 했다.

1989년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된 노동자들은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는 유명한 법정 최후진술을 남겼어. 노회찬 의원은 인민노련의 중앙위원이었지.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만큼이나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 지향의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사회주의자요”라는 말을 내뱉는 자체가 충격적이었을 만큼 한국 사회의 보수성은 육중하고 튼튼했다. 그 속에서 ‘진보’, 즉 우리 삶을 지배하는 천민자본주의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려던 노력은, 그야말로 ‘사람을 갈아 넣는’ 고문 같은 세월을 필요로 했어. 노회찬은 진보라는 고갱이를 얻기 위해 세월의 맷돌 사이에 기꺼이 자신의 삶을 끼워 넣으려 했던, 자신의 생살이 갈려나가면서도 맷돌의 어이(손잡이)를 놓지 않았던, 인생은 짧지만 역사는 길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함으로써 아픈 역사의 길이를 잘라낼 수 있다고 믿었던 진보적 노동자요 정치인이었단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그 한 예로, 〈코인데스크코리아〉라는 블록체인 미디어 관계자의 증언. 그는 노회찬 의원에게 간단한 창간 축사를 부탁했다고 해. 그런데 노회찬 의원은 뜻밖에도 해박한 지식과 뜨거운 관심을 드러냈고 엉겁결에 축사는 창간 기념 ‘인터뷰’로 둔갑을 했다지. 노회찬은 블록체인 기술이 민주주의를 심화 발전시킬 수 있다며 그 가능성에 대해 장시간 역설했다고 해. 민주주의에 관한 한 그는 어느 의미로든 ‘첨단’에 있었다. 그의 빈소에 몰려든 성소수자들, 장애인들, 세월호 참사 유족들, 삼성 백혈병 피해자들,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처지에 발품 팔아 그 환하게 웃는 영정 앞에서 얼굴 구기며 눈물 쏟은 7만2000명의 조문객이 그 사실을 줄지어 증명하지 않았겠니.

그 길이 어디 그리 쉬웠을까. 2008년 2월 노회찬 의원 이하 수많은 진보 인사들이 열정으로 만들었던 민주노동당이 깨졌단다. 북한에 민주노동당 동향 자료를 넘겼던, ‘일심회 사건’에 연루된 당원에 대한 제명안이 거부되었어. 민주노동당 내 다수를 점하던 이른바 ‘자주파’ 세력이 징계를 거부하면서 당을 더 이상 같이할 수 없었던 거지. 그날 현장에 있었던 아빠는 노회찬 의원을 우연히 마주쳤어. 항상 웃고 있던 ‘호빵맨’의 낯빛은 시커멓게 굳어 있더구나. 어찌 할 거냐 물으니 “당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게 됐다”라고 했고, 그래서 ‘힘드실 텐데요’ 덧붙였더니 노회찬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호빵맨으로 되돌아왔어. 홍조마저 띤, 입 크게 벌린 어린애 같은 미소와 함께. “언제는 안 힘들었습니까?” 그 표정을 떠올리니 콧날이 시큰해지는구나. 그래, 그는 항상 그러고 살았을 거야. ‘언제는 안 힘들었나. 내가 힘들어야 힘든 날이 오래 안 가지. 힘들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바뀔 거야’ 하면서. 천국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란다. 이미 여기서 할 만큼 한 정도가 아니라 못할 일까지 다 하신 분이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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