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평행우주의 케이팝’을 상상한다. 우리와 무척 다른 세상에도 케이팝이 있다면? 그곳에도 김세정은 있다. 그는 얼굴이 망가질 듯이 통쾌하게 웃어젖힌다. 썩 예쁜 척하지 않는 목소리로 털털하게 말도 잘한다. 씩씩하고 활기차며 장난기도 많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나이가 훨씬 많은 남성 출연진을 향해 살아 있는 뱀을 맨손으로 들이대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체험형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를 ‘긍정의 아이콘’이라며 아낀다. ‘이쪽 세계’에서 그는 소속 그룹 구구단의 간판으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누비고 있다.
김세정이 데뷔하게 된 건 Mnet 〈프로듀스 101〉을 통해서다. 방영 초기부터 압도적 인기를 누린 그는 어쩌면 애초에 이 방송보다 큰 인물이었다. 경쟁을 하라고 만든 방송에서 그는 동료들을 가르쳐주고 이끌었다. 참가자들을 평가하려고 하면 그는 ‘재밌겠다’는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눈물을 보이라고 준비해준 장면에선 “울지 않겠다”라고 대놓고 말해버렸다. 그는 단단하고 호탕하며 생동감 넘쳤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유년기와 어머니에 대한 격한 그리움이 있다. 그가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부를 때 대중은 ‘제발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는 메시지를 그의 개인사와 절절하게 연결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그의 눈물은 잦은 관심사가 되었다. 뭐든 잘하려는 부담감, 밝은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 시한부 그룹이었던 I.O.I 멤버들과의 이별, 유년기, 어머니 등의 소재 앞에 그는 호쾌한 웃음만큼이나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퉁퉁 부은 눈으로 다시 방송의 주어진 미션을 열심히 수행하는 모습은, 그에게 주어진 ‘긍정의 아이콘’이란 말의 잔혹함을 실감하게 한다. 대중이 보고자 하는 건 그런 것이다. 자신을 돌보기보다 무리하게 참고, 해야 할 일을 부서질 듯이 잘 해내는 여자. 데뷔 초, 그에게 생일선물을 준비하면서 일부 팬들이 ‘명품백이나 아이패드는 된장녀가 되므로 줘선 안 된다’고 주장해 팬들 사이에서 크게 논란이 된 바 있다. 김세정은 그저 눈물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그를 비추는 카메라와 대중의 시선이 바라는 바는 명확하다.
평행우주의 김세정도 본인만 원한다면 아이돌이 되었을 것이다. 노래와 춤도 능하고, 그가 지닌 입체적인 매력은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곳의 연예 매체들은 털털한 성격의 스물두 살 여성 아이돌에게 ‘아재’보다는 나은 별명을 붙일 수 있는 어휘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곳의 케이팝은, 누군가가 무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장르가 아니라면 좋겠다. 기왕 상상을 한다면 ‘연예인 걱정 쓸데없다’는 말은 잊고, ‘이쪽 세계’의 김세정이 편안한 마음으로 재능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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