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호 한 칸의 좌석은 72개다. 숫자에 A, B, C, D를 붙여 표기한 KTX와 달리 일련번호로만 좌석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사실을, 보따리를 든 할머니가 ‘기차표’ 들고 자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한 청년이 도움을 주는 장면을 보며 알았다. 알파벳을 모르는 ‘할매’들은 KTX는 어떻게 탈까, 왜 관절도 성치 않은데 할매들은 짐을 이고 지고 다니나 생각하는 사이 두 시간이 휙 지났다. 무궁화호만 닿는 지역에 강의를 가는 건 아마 처음 같다.
“옥천에 처음이시죠?” 대합실 계단을 내려오자 아는 얼굴이 보인다. 서울에 누가 온다고 해서 역으로 마중 나간 적이 나는 없는데, 지역에 가면 이렇게 픽업을 나온다. 과분한 환대다. 이날 강연은 옥천신문사 주최다. 〈옥천신문〉은 안티조선 운동을 하면서 1989년에 만들어진 지역신문이고 전국에서 옥천에만 〈조선일보〉 지국이 없다고, 서울에서 뵙고 ‘아는 얼굴’이 된 포도밭출판사 최진규 대표가 말한다.
역에서 5분 남짓 가니 옥천신문사가, 길 건너 건물 2층엔 〈월간 옥이네〉 잡지사와 ‘포도밭출판사’ 사무실이, 1층엔 널찍한 북카페 ‘둠벙’이 자리했다. 집성촌처럼 모여 있는 사무실에 들러 간단히 목례를 나누고 오늘 강연장인 북카페를 둘러보는데, 내 몸은 또 서가 앞이다. 최진규 대표는 최근에 나온 책이라며 〈보통의 행복〉을 내게 주면서 음료를 만들고 있는 카페지기에게 말한다. “한 권은 제가 채워 넣을게요.”
나는 책값을 지불하려다가 ‘외상’으로 긋고 주는 즉석 선물이 재밌어서 넙죽 받았다. 좀 있다가 옥천 사람이 쓴 옥천 시인 정지용 시 비평집을 구매하면서 선물받은 책을 한 권 더 샀다. 강연장엔 청소년 기자단 학생들, 아이를 데려온 주부들, 옥천의 기자들, 지역주민들이 속속 들어찼다. 이렇게 직업, 성별, 나이 고른 분포를 보이는 청중 앞에서 강의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농사지은 건데 조금이지만 드셔보세요.” 강연이 끝난 후, 한 여성이 스윽 건네고 총총 사라진다. 누런 종이봉투 속엔 연두색 포도송이가 싱그러운 향을 내뿜는다. 그러고 보니 옥천은 포도의 고장. 지역 출판사 이름도 포도밭이다.
사람 옆에 사람이 있음을 환기시키는 능력
옥천에서 팔이 자랐다. 무궁화호 막차를 기다리는 내 손 아래로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책 세 권이 담긴 비닐봉지, 독자가 준 포도 선물, 아는 사람이 챙겨온, 간수까지 다 먹을 정도로 꿀맛이라는 두부 두 모와 아이스팩이 든 에코백. 그리고 기자들이 준 〈월간 옥이네〉 8월호와 박누리, 김예림, 임유진, 최문석, 이범석, 장재원 등의 명함까지 더해진 내 가방은 어깨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설상가상 뒤풀이 자리에서 먹다 남은 병맥주까지 악착같이 손에 쥔 나는, 무궁화호에 타는 중·장년 여성들처럼 보따리를 든 여인이 된 것이다.
KTX에선 대개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나도 그랬다. 타인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공기가 팽배한 그곳은 “타자가 두려운 사회(58쪽)”의 축소판이다. 무궁화호엔 객차 바닥에 옥수수 속대가 나 몰라라 나뒹군다. 좀 더 허술한 공기가 흐르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오는 “관계 개시 기술(46쪽)”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아주머니들이 필요해요. 은행에 줄 서 있을 때 어느 아주머니께서 ‘오늘 사람이 북적북적하네!’라고 한마디 던지면 주변이 확 온화해져요(51쪽).” 일본의 사회학자는 ‘아주머니 기술’이란 참신한 용어로 칭한다. 그건 사람 옆에 사람이 있음을 환기시키는 능력 같다. 모처럼 북적북적한 ‘보통의 행복’을 체험하고 올라가는 길, 잠과 책을 넘나들며 밑줄을 긋는다. “의외로 우리들은 얽어매여 있어서, 개인으로 산다는 게 어려워요(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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