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조각으로 코에 피어싱을 한, 두꺼운 입술과 검은 피부의 사내들. ‘식인종’이라는 단어에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리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진부함과 무책임함으로 점철된 이 묘사가 은연중에 가리키는 곳은 아무래도 아프리카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정작 인간이 인간을 ‘고기’로 소비하는 문화가 위세를 떨쳤던 곳은 평화롭기 짝이 없어 보이는 남태평양 지역이었다.

2009년, BBC 다큐멘터리는 바누아투 제도에 속한 어느 섬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섬사람들이 영국인 찰스 밀러 윌리엄스를 초대해, 섬사람들의 조상이 그의 고조할아버지를 잡아먹은 것에 대해 사과했다는 내용이다. 1839년, 고조할아버지인 선교사 존 윌리엄스는 다른 선원들이 원주민을 해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 섬에서 살해당해 잡아먹혔다.

ⓒ탁재형 제공피지의 한 기념품점에서 판매하는 ‘식인 도구’.

이 지역에서 식인 문화가 얼마나 만연했는지는 전설에도 잘 드러나 있다. 사모아의 왕 말리에토아는 인육을 좋아해 하루에 젊은 남자 두 명씩을 요리해 부하들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하루는 왕의 식사가 되기 위해 궁전으로 온 젊은이들이 왕자와 마주쳤고, 이들에게 연민을 느낀 왕자가 희생자들 대신 코코넛 잎을 뒤집어쓰고 접시에 누워 왕 앞에 나섰다. 음식 대신 왕자의 얼굴을 마주한 왕은 크게 느낀 바가 있어 그 후론 식인을 금지하고 물고기만을 먹도록 했다.

그런데 이 지역 사람들을 사람 고기에 미친 이상식욕자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사실 이 지역에서 식인의 풍습은 육류에 대한 취향 문제라기보다 복수심과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백인들의 남태평양 진출사에서 가장 끔찍한 식인 사건으로 꼽히는 1809년 보이드 학살을 보더라도 복수와 얽혀 있다. 뉴질랜드 베이오브아일랜즈에 정박했던 보이드 호 선원과 승객들은 마오리족에게 인질로 붙잡혀, 이들 중 66명이 목숨을 잃고 고깃덩어리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의 시발점엔 마오리 족장의 아들을 붙잡아 채찍질했던 백인 선장의 횡포가 있었다. 적의 물리적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식인 행위야말로, 남태평양 원주민들에게는 궁극의 복수 방법이었다.

사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식인 풍습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힘이 인간에게 축적되고 전해지는 것에 대한 그들만의 개념, ‘마나(Mana)’를 알아야 한다. 게임 마니아들에게는 ‘마법을 쓸 수 있는 힘’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마나는, 알고 보면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이다. 때로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나 능력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한 부족이 가지고 있는 권위 전체를 말할 때도 있다.

남태평양 사람들의 ‘마나’에 대한 열망

마나를 흡수하는 방법은 크게 나눠 세 가지다. 타고나거나 결혼을 통해 얻거나 높은 마나를 가지고 있는 대상을 ‘먹는’ 것이다. 적뿐만 아니라 존경하는 가족 구성원이 생을 마쳤을 때도, 성대한 잔치를 열고 그의 신체 부위를 나눠 먹었던 풍습은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지금도 피지에서는 과거 인육을 먹던 시절 사용하던 도구들을 기념품으로 절찬리에 판매 중이다. 나에게 익숙한 문화권으로부터 정말 멀리 떠나왔다는 상징적 이미지로만 식인이 소비되는 현장이다. 그보다는 조상으로부터는 지혜를, 적으로부터는 용기를 얻으려 했던, 남태평양 사람들의 마나에 대한 열망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개척과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항해자들을 잠깐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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