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지난 9월 초 태풍 ‘제비’가 일본에 상륙했다.

‘은혜 갚는 착한 새’라는 이미지를 가진 이름치고는 터무니없었다. 9월4일, 제21호 태풍 ‘제비’는 최근 25년간 일본에 상륙한 태풍 중 가장 강력한 힘으로 열도를 훑고 지나갔다. 11명이 사망하고 6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재산 피해는 무려 4조원에 달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여준 장면은 더 충격적이었다. 마치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우리 앞에 놓인 자연의 힘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일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였다.

일본 열도를 방파제처럼 앞세우고 있는 한반도는 그나마 태풍으로부터 최소한의 방어를 받는 편에 속한다. 일본을 비롯해 열린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지역은 태풍이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접어들 무렵, 대양의 수증기를 빨아올려 그 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를 맞닥뜨리게 된다. 2002년 여름, 괌에서 마주한 태풍 ‘차탄’이 그랬다. 바다는 머리를 꼿꼿이 들고 10m가 넘는 절벽 꼭대기를 때렸고, 사람들은 나무판자를 덧대고도 부들부들 떨어대는 유리창과 쇼윈도를 부여잡고 안간힘을 썼다. 전선과 신호등은 쥐불놀이 깡통처럼 빙빙 돌다 이내 끊겨나갔고, 전기와 물이 끊긴 시내 쇼핑센터에는 집으로 가는 길이 막힌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성였다. 휴가철, 열대의 천국을 소개하려던 취재 계획은 파도 거품처럼 허공으로 사라졌다. 다큐 주제를 ‘재난을 극복하는 괌 사람들의 집념’으로 급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태평양을 자신의 앞마당으로 여기는 미국 해군은 점점 더 위력이 강해지는 태풍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평가한다. 2013년 3월, 미국 태평양군 사령관이던 새뮤얼 라클리어 대장은 슈퍼 태풍이 발생하는 분석 결과를 토대로 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구온난화로 발생하는 급격한 기후변화는 앞으로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중략) 우리가 지금껏 언급한 수많은 위협보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일어날 확률이 훨씬 높다.”

이 보고가 있고 나서 8개월 후, 태평양에서 발생한 슈퍼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덮쳤다. 중심 풍속은 시속 315㎞에 달했고, 비교적 초기에 경보가 내려져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6500명, 부상자 2만7000여 명이 발생했다. 태풍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던 대도시 타클로반은 마치 원폭을 맞은 듯, 처참한 폐허로 변해버렸다.

태풍은 기후라는 엔진에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적으로 해소되는 현상

이토록 무서운 태풍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운명이 태평양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과학으로 태풍을 분석해 알아낸 사실은, 태평양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기상 현상 대부분이 만들어지는 곳이라는 점이다. 지구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면적 때문에 태평양은 태양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열에너지를 흡수한다. 빛을 받으면 금방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고 마는 육지와 달리, 액체 상태의 바다는 열에너지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흐름에 따라 동에서 서로, 위에서 아래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태평양 자체가 에너지가 저장되는 배터리이자, 스스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모터이기도 한 것이다. 증기기관차가 내뿜는 날카로운 기적 소리처럼, 태풍은 기후라는 엔진에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적으로 해소되는 현상이다.

심화되고 있는 지구온난화는, 지금껏 균형을 유지하며 작동하던 태평양이라는 엔진에 여분의 연료를 주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계기판의 바늘이 치솟으며 배기구가 굉음을 내뿜기 시작했다. 뻔히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옆 동네를 강타한 태풍의 위력이 우리를 집어삼킬 때까지, 에어컨 리모컨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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