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3대 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고려 강감찬의 귀주대첩, 조선 이순신의 한산대첩이다. 각각 수나라, 거란족, 일본과 맞싸워서 거둔 빛나는 승리였지. 오늘은 귀주대첩에 대해 얘기해보기로 하자꾸나. 내년이면 귀주대첩이 일어난 지 꼭 1000년이 된다. 귀주대첩은 1019년 음력 2월, 오늘날의 평안북도 구성에서 벌어졌으니까. 이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단 ‘장군’이라 부르기는 했다만 강감찬은 장군 호칭이 그리 익숙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문관(文官)이었어. 고려 초기의 문관들은 칼이라고는 부엌칼도 안 잡아봤을 조선 시대의 허약한 선비들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강감찬은 엄연히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관이었어.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강감찬이 과거에 붙은 건 좀 늦은 나이인 서른여섯 살 때였어. 좀 이상한 건, 장원급제의 후광도 있었을 텐데 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에 임명될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강감찬의 이름은 고려사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즉 왕건을 도운 핵심 공신으로 공신당(功臣堂)에 초상화가 걸리는 영광을 누린 이였어. 이처럼 집안 ‘백’도 든든했는데 왜 그렇게 화려한 관직 생활을 못했던 걸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빠는 강감찬이라는 위인을 묘사한 〈고려사〉의 한마디에 주목해보고 싶구나. ‘체모왜루(體貌矮陋)’, 즉 키가 작고 생긴 것이 볼품없었다는 뜻이야. 강감찬 정도의 공을 세운 위인이면 그리 준수하지 못했더라도 그 외모에 대한 평을 점잖게 해주는 게 상례일 텐데. 본격적인 중앙 관직에 들어섰을 때 강감찬은 환갑도 넘었더란 말이지.

ⓒ연합뉴스서울 관악구 낙성대공원에 위치한 강감찬 장군의 기마청동상.

송나라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강감찬은 잘생기고 훤칠한 부하에게 좋은 옷을 입혀 앞에 내세우고 뒤로 물러서 있었는데 그래도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지. 강감찬의 ‘진면목’을 강조한 사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묘한 상상이 드는구나. ‘못생겨서 미안했던’ 강감찬의 슬픈 사연이 이런 설화로 승화된 건 아닐까?

강감찬의 또 다른 설화는 강릉이니 경주니 지방관으로 있을 때를 주로 묘사하고 있어. 거기서 강감찬은 호환이 발생한 곳에 가서 인간으로 변한 호랑이 두목과 담판해 호랑이들을 몰아낸다거나 개구리 울음소리를 멎게 한다는 등 비범한 면모를 보이지. 외모는 볼 것이 없으나 더할 나위 없이 유능했던 강감찬은 늘그막에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돼. 거란의 2차 침략 때 항복을 만류하고 강력히 항전을 주장한 이가 강감찬이었어.

당시 국제 정세는 지금과 묘하게 비슷해. 신흥 거란족의 요나라가 한족의 송나라를 압도하며 화북 지역을 장악했고 고려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어. 송과 요 사이의 줄타기 외교를 구사하고 있던 고려가 요나라로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지. 요나라 전성기를 일군 황제 성종은 마침내 세 번째 고려 침공을 기획한다. 황제의 친척인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움직인 거지.

이전의 침략에 비해 군대 수는 줄었지만 대부분 기병이었던 그들은 ‘전격전’을 꾀해. 다른 지역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개경으로 달려가서 왕을 사로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한 거지. 그러나 개경 근처에서 그들이 마주한 건 성 안으로 들어가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고려인들이었지. 한때 거란군을 피해 전라도 나주까지 도망쳐야 했던 왕 현종은 죽어도 개경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도성 결전을 다짐하고 있었어. 이후 한반도를 다스린 어느 왕도 따르지 못한 용기를 내뿜으면서.

소배압은 특공대를 파견해 개경 성문에 접근했는데 이를 간파한 고려군은 역습에 나서서 거란군의 정예 기병대를 전멸시켜버렸어.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한 패배에 놀라고 식량 등 보급까지도 여의치 않게 된 소배압은 후퇴를 결정해. 소배압도 암담했을 거야. “개경만 바라보고 고려의 주력군을 피해서 달려왔는데, 돌아간다면 그들을 만나야 한다.” 당시 귀주는 압록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요지였어.

때마침 영화처럼 기병대가 나타났다

ⓒ연합뉴스낙성대공원 내 안국사에 설치된 귀주대첩 벽화.
낙성대공원은 강감찬 장군을 기려 1974년 조성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성을 빼앗고 지키는 공방전은 수도 없지만, 야전에서 펼치는 이른바 ‘회전(會戰)’은 흔하지 않은데 귀주에서 강감찬은 이 대회전을 통해 거란의 기를 완전히 꺾을 생각을 한 듯해. 마침내 거란군이 나타난다. 비록 후퇴 중이라지만 대륙을 벌벌 떨게 한 거란 기병대는 거침없이 고려군 진영으로 뛰어들었어. 고려군 20만, 거란군 10만, 도합 3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데 엉키고 주위를 맴돌고 돌진하며 맞부딪쳤다. 변발 휘날리며 화살을 쏘아대는 거란 궁기병, 검차를 앞세우고 돌격하는 고려 검차병, 요나라의 자랑 중장기병들. 그들을 향해 창을 내밀고 도끼를 휘두르는 고려 보병들이 어지러이 뒤섞였지.

그런데 실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져. 개경을 지키러 왔던 동북면(함경도) 병력. 고려의 최정예라 할 동북면 기병대 1만2000기가 천둥 같은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거란군의 뒤를 찌른 거야. 적재적소에 등장한 지원군이었지. 때마침 하늘도 고려를 도왔어. 그때까지 불던 북서풍 대신 남풍이 거세게 거란군 쪽을 몰아치기 시작한 거야. 그 순간을 강감찬은 놓치지 않았고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완전히 기가 꺾인 요나라 군대에 대한 섬멸전을 펼쳤지.

강감찬은 그날의 남풍을 예측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빠는 그런 신이한 능력보다는 다른 기록에서 강감찬의 역량을 본단다. 이 귀주대첩 전 그는 임금에게 아뢴 뒤 경상도 지역에 있던 자신의 땅 열두 결을 “자식을 전쟁에 보낸” 이들에게 나눠준다. “전쟁에 나간 이들이 집 걱정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관 강감찬이 대군을 이끌고 동북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던 거란군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귀신을 부리는 술수가 아니라 별안간 전쟁에 끌려나오고 피를 흘려야 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이해하고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들 말은 하지만 실천은 어려웠던 마음. 그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귀주대첩 후 고려 행정기관 도병마사는 현종에게 “이제 전쟁터에서 거란을 막아 전공이 있는 자 9472인은 관직을 올려주시라”고 청했고, 현종은 이에 따르는 한편 전사한 이들에게 쌀과 보리를 지급하라 명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성들을 위로한단다. 국왕이 죽음을 각오하고 수도를 지키고, 최고 사령관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먼 길 떠나온 지방의 병사들을 돕고, 1만명에 가까운 이들의 공을 기억하고, 죽어간 이들까지 챙겼던 고려. 이렇게 보면 귀주대첩의 승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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