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배술의 고향은 평안도이나 지금은 남한의 명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함께한 4·27 남북 정상회담의 만찬주였던 문배술에 대한 청와대의 설명이다.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86-가’호인 문배술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함께한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만찬주로 올랐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 때는, 만찬주는 아니어도 반주로 식탁에 올랐다.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늘 함께한 술이다.

문배술. 지금은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검암2로 15번길 27에 자리한 문배주양조원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그 고향은 평양이다. 문배주양조원 이승용 실장이 제공한 연혁과 문화재관리국이 간행한 〈1985년 주요무형문화재 결정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의 문배술은 1946년 평양에서 생산을 시작한 평천양조장의 맥을 잇고 있다.

ⓒ시사IN 신선영수수와 쌀로 지은 고두밥에 조 입국을 섞어 문배술을 만든다. 고두밥에서 달큰한 향이 훅 끼친다. 위는 가업을 이어받은 문배주양조원 이승용 실장.


문배의 향이 난다고 해서 문배술이다. 하지만 문배술에는 문배가 들어가지 않는다. 문배를 넣지 않았는데도 문배의 향이 피어오른다 하여 문배술이다. 생물학의 분류를 많이 생략하고 요약하면 문배술의 문배란 돌배다. 곧 문배 향이란 평안도 지역 재래종 돌배의 향이다. 잘 빚은 술, 그리고 잘 빚어 내린 증류주에는 과실의 방향(芳香)이 감돌기 마련이다. 오로지 조·수수·쌀 이 세 가지 곡식을 가지고 빚어 내렸으되 문배의 우아한 향이 감도는 고급 증류주, 소주가 바로 문배술이다.

“잡수어봐요.” 이 실장이 수수와 쌀로 지은 고두밥을 내민다. 고두밥에 조 입국(전분 당화제)을 섞어 빚기가 문배술의 시작이다. 고두밥에서 달큰한 향이 훅 끼친다. 입에 넣고 씹으니 곡물 특유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단맛이 입안을 채운다. “달죠? 수수가 참 달아요. 단 만큼 술이 참 잘 되죠. 여기에 쌀과 조가 어우러져서 구수함과 함께 개성 강한 방향까지 생겨요. 단맛도 도드라진 단맛이 아니라 은은한 단맛이죠. 중국 백주(白酒)의 맛과 향하고는 전혀 다르죠? 개성 뚜렷한 좋은 향이 감도는 무색투명한 제대로 된 증류주, 저는 문배술을 이렇게 소개해요.”

〈1985년 주요무형문화재 결정보고서〉 속 양조 원료를 보면 이렇다. ‘특수한 원료의 사용 여부 및 종류와 특징:없음.’ 달리 향이나 맛을 더하는 원료가 없다. “재료가 이렇게 간단하죠. 그래서 제대로 만들자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해요. 할아버지 때 희석식 소주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술에다 이것저것 섞는 거 아니다’ 하시면서 끝내 희석식 소주는 안 하셨어요. 집중력을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겠지요. 저도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 과정이 재밌어요. 조로 입국을 만들고, 수수와 쌀로 고두밥을 지어 술을 빚고, 15일간 발효해서, 증류하고, 몇 개월 동안 숙성시키지요. 그 변화를 살피면서 잠을 못 잘 때도 있어요.”

 

ⓒ시사IN 신선영2014년부터 문배술은 도자기 병 대신 날렵하고 투명한 유리병(맨 오른쪽)을 사용하고 있다.


5대에 걸쳐 전수된 문배술 제조법

이승용 실장이 말한 할아버지가 바로 1986년 문배술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고 이경찬(1993년 타계)이다. 그는 평양에서 9대를 살았다. 그의 할머니 박씨는 집안에 평양 지역의 증류 소주인 문배술 제조법을 아들 이병일에게 물려주었고, 이는 다시 이병일의 아들 이경찬에게, 그리고 이경찬의 아들 이기춘에게 대물림되었다. 정리하면 박씨(이승용의 고조모)-이병일-이경찬-이기춘-이승용 5대에 이어진 계보이다. 그 세월 동안 평양 지역의 가양주가 전통 소주를 대표하는 제품으로 성장해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배술은 한국전쟁 통에 명맥이 끊겼다. 남으로 피란 온 이경찬은 1952년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거북선’을 상표로 재생산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에는 귀하디귀한 곡식을 가지고 술을 만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곡주 생산을 금지한 양곡관리법이 아니라도 공무원들이 곡식으로 술 빚는 것을 마구잡이로 막았다고 해요.”

거북손표 문배술은 1955년 생산을 중단한다. 이후 문배술은 오로지 집에서만 내려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서울올림픽이 전환점이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해외의 고급 주류에 견줄 만한 전통주를 육성하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튼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전통주에 대한 조사 보고에 나섰고, 문배술은 1986년 무형문화재에 지정된다. 1989년 드디어 서울 연희동에 문배주양조원이 설립되어 빛을 보게 된다.

 

 

ⓒ시사IN 신선영서울 연희동 옛 문배주양조원 터에 있는 전시장에서 이승용 실장이 문배술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재생산 이후 문배술은 꾸준히 성장했다. 1995년 이승용 실장의 아버지인 이기춘은 이경찬에 이어 문배술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다시 농림부에 의해 전통식품명인 제7호로 지정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실장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1975년생인 이 실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때까지 문배주 제조법을 전수받았다. 대학에서는 농화학을 전공했다. 발효와 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저를 그렇게 예뻐하셨고, 당연히 문배술을 이어갈 거라고 여기셨어요. 그런데….” 이 실장이 잠깐 말을 끊고 취재진을 둘러본다. 가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할 즈음 그는 고민이 많았다. 문배술은 술이라기보다 무형문화재였다. 집안의 몇 사람이 소줏고리 앞에서 하루 종일 앉아서 받은 술로 과연 몇 사람이 마실 것인가, 판다면 몇 병을 판단 말인가. “가업을 맡기로 할 당시 막 내린 문배술 향을 기억해요. 내릴 때 제대로 강렬해야 나중에 무르익은 문배의 향으로 변해요. 그 기억이 지금 제 관능상의 기준점입니다. 동시에 설비나 장치를 이용하면, 사람이 집중해야 할 데에 더 효율적으로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1994년 문배주양조원은 김포로 공장을 이전한다. 2007년에는 공장을 신축해 오늘의 자리로 다시 옮긴다. 그러면서 일은 온전히 이 실장에게 돌아왔다. “나중에 역한 탄내가 슬그머니 껴드는 경우도 있지요. 손으로 낱알 하나씩 일일이 골라가며 만든 술인데 조금만 이상해도 그냥 버려야죠. 몇 개월 간직했는데 하수구에 버려요. 얼마나 아까운지, 해본 사람은 속이 터져요. 구체적인 기술의 혁신과 설비와 공정의 개선, 제조상의 데이터 모으기에 힘을 써야지요. 그러고도 다가 아니에요.”

김포 문배주양조원에서 꿈꾸는 또 다른 소원

이승용 실장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잘 뽑은 제품은 기본이고, 거기 ‘나만의 색깔’을 입히고 싶었다. 처음에는 출고량이 늘면 그저 좋았단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나한테 “잘했다” 소리를 할 수 있느냐를 자꾸 묻게 된단다. 그 물음의 연장에서, ‘올드한’ 이미지인 문배술 도자기병을 날렵하고 투명한 유리병으로 바꾼 사람이 바로 이 실장이다. “세상에서 전통주라고 하는 술은 여전히 명절 선물용 아니면 저가 제품이죠. 어느 해였나, 명절 앞두고도 너무 일이 없는 거예요. 속으로 겁이 났어요. 이렇게 해서 지속 가능할까.”

2013년 말에서 2014년 초 사이에, 이 실장은 처음 유리병을 시도했다. 젊은이들에게 “이 술 한번만 마셔보라”고 내밀기에는 400㎖ 호리병 모양 도자기 병이 부담스러웠다. “40°짜리도 부담스러울 수 있죠. 23°와 25° 제품도 갖추었어요. 병 바꾸기와 용량과 도수 낮추기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이게 주효했어요. 한 번에 뭐가 확 된 게 아니고, 정말 뭐라도 하자고 변화를 꾀한 게 쌓여서 잘된 것 같아요.”

두 번째 전환은 젊은 요리사와 함께한 ‘페어링’을 통해 이루어졌다. 안심구이, 광어회, 공심채볶음, 가지튀김 등 다양한 요리를 문배술과 맞추어보았다. “처음 문배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래요. 너무 독하고 향이 세다고. 말이 세다지, 좋은 향이라고 느끼지 못했다는 거죠. 그런데 다양한 재료의 다양한 음식과 짝 지어보니 새로운 조화를 이루는 거예요.”

그 뒤로 자신감이 붙었다. 음식과 이렇게 잘 어울린다면 문배주 특유의 강렬함은 이취(異臭)가 아니라 향기임을 확신했다. 증류주는 원래 독한 술이고, 독한 만큼 깔끔하게 혀끝과 목구멍에 치고 지나가는 맛이 증류주의 제맛이라는 설명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이때 유리병은, ‘있는 그대로 무색투명함’이라는 문배술 홍보 기획과 맞아떨어졌다. 그러고는 젊은이들이 모이는 음식점과 술집에, 대형 유통업체에 더 많이, 더 자주 문배술이 나갈 수 있었다. 작년부터는 뉴욕과 캘리포니아로도 수출이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수수 농사, 조 농사도 짓는 거예요. 원료에서부터 내 색깔을 갖고 싶어서. 공장 주위의 밭은 일종의 실험용 밭이죠. 품종을 비교하고 개량하는. 이 밭에서 나온 놈으로 실제로 술과 입국을 만듭니다. 그러고도 또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또 다른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평양 옥류관 입점, 북쪽의 조와 수수로 문배술 만들기, 평천양조장 재가동이죠.” 남북 화해 시대에 젊은 전통주 기업인은 거침없는 꿈을 꾼다. 거침이 없되, 꿈도 기획도 구체적이었다.

기자명 글 고영(음식문헌 연구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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