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7일 폼페이오 장관이 네 번째로 평양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미 비핵화 협상의 주된 걸림돌은 종전선언 문제였다. 즉 북한이 핵 목록을 신고하는 대가로 미국은 평화협정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종전선언에 응한다는 ‘신고 대 선언’ 문제였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실무자들 역시 남북한의 전쟁 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됐음을 확인하는, 정치적 상징성이 담긴 종전선언을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9월19일 남북 정상이 합의한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의 ‘상응 조치’를 전제로 영변 핵시설 폐기를 공식 언급하며 기류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원하는 미국의 상응 조치가 종전선언뿐 아니라 대북 제재 해제까지 겨냥하는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북한의 속내는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9월29일 유엔총회 때 한 연설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대북 제재 문제를 양국의 신뢰 구축과 연계해, 제재 해결 없이 먼저 비핵화에 나서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10월15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핵 목록을 요구한 폼페이오 장관에게 양국의 신뢰 구축 차원이 우선이라며 거부하고, 종전선언과 함께 대북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는 〈시사IN〉에 “결국 비핵화 협상이 진전되려면 미국은 일부 대북 제재를 완화하거나 해제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말하는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북한이 인내심 있게 기다리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은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 이전엔 대북 제재를 풀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 미국은 지난해 1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뒤 이른바 ‘최대 압박과 관여’라는 기조 아래 대북 제재를 지속하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주된 원인도 제재의 결과라고 본다. 그런데 북한이 제재 문제를 비핵화 협상의 진전, 나아가 2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의 핵심 이슈로 삼으면서 미국도 딜레마에 빠졌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의지에 따라 대북 제재 기조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을 고대하면서도 대북 제재에 관해서는 신중한 편이다. 그는 10월9일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우리는 북한에 대한 중대한 제재를 해제하지 않았다. 나도 제재를 풀고 싶지만 그러려면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라고 말해 북한이 취해온 일련의 비핵화 조치가 미흡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이후 최근까지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시험 중단,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미사일 발사기지 폐쇄 등 일련의 선제적 핵 조치를 취해왔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무언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미국은 다른 무엇보다 북한이 핵무기와 핵시설, 핵물질, 탄도미사일 일체에 관한 핵 목록을 제출해주길 바라고 있다. 북한이 만일 핵 목록을 제출하면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국방정보국(DIA) 등을 비롯한 복수의 정보기관을 통해 수집한 대북 핵 정보와 면밀히 비교·검토할 것이다. 이를 근거로 북한에 추가 정보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이후 확정된 핵 목록을 바탕으로 검증 및 폐기 절차에 들어가는 본격적 비핵화 작업을 미국 측은 기대한다. 문제는 북한이 미국의 핵 목록 제출 요구에 맞서 우선 신뢰 구축 차원에서 제재 해제를 공식 요구했다는 점이다. 북·미 양측이 기존 입장을 고집하는 한 타협점이 나오기 힘든 상황이다.
폼페이오 장관과 북측 인사 간 회동 계획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시사IN〉에 “핵, 미사일 시험 일시동결 등 북한이 지금까지 취한 것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조치 없이 미국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전에 제재를 해제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은 실질적인 비핵화 과정의 기준선(baseline)으로 삼고 있는 북한의 핵 목록을 받지 않고는 제재를 풀 근거가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이후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에게 비핵화 실무 협상을 맡겼지만 이마저 난항을 겪고 있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측 상대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과 만나기 위해 10월15일 이후 유럽에 머물렀던 비건 대표는 최 부상이 약속한 날짜에 회동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빈손으로 귀국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폼페이오 장관이 최근 자신과 북측 고위 인사 간의 10월 하순 회동 계획을 미국 언론에 밝혀 주목된다. 특히 문제의 북측 인사는 지금까지 그의 협상 창구였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아닌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폼페이오 장관은 “해당 고위 인사와 만나면 비핵화에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진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해 워싱턴 외교가도 기대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도 종전선언 못지않게 제재 해제 문제가 핵심 의제로 떠오를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경우 북한이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취한다는 전제로 미국이 어느 선에서 제재 해제를 고려할지가 관심사다. 존 메릴 박사는 “미국이 적어도 남북 사이의 정상적 상업 활동 및 인도적 차원의 활동에 대해 대북 제재를 해제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메릴 박사는 “영변 핵시설 폐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북한도 그때까지 미국의 제재 완화를 기다리긴 힘들 것이다. 일단 미국 사찰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거리 미사일 몇 기를 파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미국은 일부 대북 제재를 완화하는 데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북한이 1차 정상회담 때처럼 실무선이 아닌 정상회담 자리에서 담판을 지으려 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고위 인사들을 두루 만난 대니얼 스나이더 스탠퍼드 대학 교수는 〈시사IN〉에 “북한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얻을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재 미국 관리들이 적극 트럼프 대통령을 말리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백악관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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