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빠는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띄엄띄엄 ‘다시 보기’를 하고 있어. 드라마를 즐기지 않으나 어쩌다 하나에 ‘꽂히면’ 밤잠을 설쳐가며 ‘정주행’을 하는 아빠로서는 그 진도가 빠르지 않은 편이야. “합시다! 러브”를 부르짖는 김태리 언니의 매력이야 한이 없고, 이병헌 아저씨의 연기력도 충만하다만, 도무지 몰입되지 않는 이유는 드라마에 너무나 많은 ‘판타지’가 등장해서야.

일단 첫 회부터 그랬다. 1871년 신미양요의 포성이 울리던 강화도 땅에 우리 말 유창한 서양 사람이 도공(陶工)과 거래하고, 그의 도움으로 노비 소년이 미국으로 밀항한다는 설정이 얼마나 어색하던지. 그 5년 전에 프랑스 신부 9명의 목이 달아나는 병인박해가 있었고, 척화비는 장승처럼 서서 버틴 가운데 미군과 조선군의 혈투가 벌어지는 판에 양복 빼입은 서양인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이건 이순신의 거북선에서 기관총을 쏘는 수준의 판타지가 아니겠느냐는 말이지. 그러니 몰입이 안 될밖에. 하지만 첫 회에 등장한 신미양요의 광성진 전투 장면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단다. 오늘은 이 광성진 전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꾸나.

ⓒ전쟁기념관 제공2010년 5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된 어재연 장군.

1866년 조선에서는 최대 규모의 가톨릭 박해가 일어났고 앞에 말했다시피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신도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어.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열강에 어떤 식으로 두들겨 맞았는지를 조선도 잘 아는 만큼 혹여 발생할지 모를 외침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 하필이면 그 시점에서 한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해. 배 이름은 제너럴셔먼호. 좋게 거절할 때 돌아가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그들은 대포를 쏘아 사람까지 죽여가며 횡포를 부렸어. 분노한 평양 관민들의 화공(火攻)에 배는 불타고 선원들은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지. 미국도 남북전쟁 후 수습에 정신이 없었던 만큼 이 사건은 한동안 묻혀 있다가 몇 년 후 수면 위로 부상했단다. 미국은 함대를 출동시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캐묻는 한편 통상을 강요하게 돼. 한양으로 통하는 수로를 지키던 강화도 손돌목의 수비군들은 버젓이 코앞을 지나가는 미군 함대에 대응해 포격을 퍼붓는다. 미군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일단 물러선 뒤 포격에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으면 상륙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지.

1981년 9월28일자 〈중앙일보〉에는 신미양요 참전 미군 중대장 밀턴 대위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일부(단국대 김원모 교수 발굴)가 실렸어. 그 내용을 보면 미군 병사들도 미국 함대가 조선의 포격을 유도하다시피 한 사실을 알고 있었어. “우리와 대화를 나눈 조선 대표 3명은 우리 관측 함정이 강화해협으로 진입해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우리 함정에 ‘발포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소’.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포격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했던 것이오’. 이제 우리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포격에 대한 보복 원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소.” 최전방 경계 지역에 나타난 적의 배가 유유히 눈앞을 지나가는데 잠자코 있을 수비병이 어디 있겠니? 오히려 미군은 그걸 노리고 있었던 것이지. 그러고는 “U.S. under attack!(미국이 공격받았다!)”이라 외친 것이고.

미군은 본격적으로 상륙전을 펼쳤어. 초지진과 덕진진이 맥없이 함락됐고 미군의 다음 목표가 광성진이었어. 광성진에는 진무중군 어재연 휘하 조선군 수백명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지. 이 수백명의 병력은 각각 소속 군영이 다르고 강화도 땅을 밟아본 사람은 어재연뿐이었어. 즉 손발도 안 맞고 지형에도 익숙하지 못한 군대였지. 그래서였을까. 어재연은 병사들을 불러 모아 부채 하나를 내놓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쓴다. “모두들 자신의 이름을 쓰거라. 우리는 한마음으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병사들은 엄숙하게 자기 이름을 부채에 남겼어. 글을 모르는 이들은 부탁도 했겠지. 수백명의 이름들로 빼곡히 채워진 부채는 지금도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남아 있단다. 병사들의 다짐을 받은 어재연은 수(帥)자 기를 높이 세우고 미군의 공격을 기다린다. 미군은 광성진을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포위한 뒤 공격해 들어왔어.

조선군은 왜 흙까지 던지며 싸워야 했을까

어재연은 결사의 맹세를 다시 언급하며 병사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이제 피할 곳도 없다. 적병들이 포대를 좁혀오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병사들도 호응했다. 미군의 포탄은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날아와 성벽을 무너뜨리고 조선군을 쓰러뜨렸어. 미군은 거침없이 상륙해 광성진을 유린했다. 조선군은 열심히 싸웠어. “칼, 창이 부러지자 흙까지 던지며 싸웠고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여 총검을 목에 겨누고 찔러달라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 장렬함에 감탄한 미군은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하고 물러갔다”는 식의 이야기는 너도 들어서 잘 알 거야.

ⓒ연합뉴스2007년 10월22일 미국 해사박물관에서 ‘장기 대여’해 136년 만에 귀환한 ‘어재연 장군기’.

크게 틀린 소리는 아니야. 남북전쟁을 치른 베테랑 미군들도 이런 처절한 저항에는 혀를 내둘렀으니까. “조선인들의 애국심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보여준 적이 없을 듯하다”라는 미군의 평가처럼. 우리는 아름다운 전설보다는 불편한 진실에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어. 조선군 대포는 병자호란 때 쓰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화기였고 미군 함포 사정거리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시작일 뿐이야. 조선군의 포탄은 목표물에 명중했을 때 폭발하지도 않는 그냥 쇠뭉치였다. 광성진 요새 벽을 단번에 허무는 미군의 포탄에는 댈 것이 못 되었지. 대포는 그렇다 치고 성벽을 넘어온 미군과는 결국 백병전이 벌어졌을 텐데 미군 전사자는 3명, 조선군은 수백명이 죽었단 말이야.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칼, 창이 부러지자 흙까지 던지며 싸운” 이유는 바로 조선군의 칼과 창은 미군의 총검에 부딪치자마자 부러지거나 휘어버렸기 때문이야. 근대적 제철 기술로 만들어진 미군의 총검은 대장간에서 옛날 하던 대로 두들겨 맞춘 쇠와는 질적으로 달랐단다. 그리고 하나 더, 조선군의 기동은 미군들처럼 날래지 못했어. “총알이 뚫지 못하는 아홉 겹 솜옷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는 요새 안에 있었고 100여 명의 시체는 요새 밖에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솜이 밖으로 튀어나온 아홉 겹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종군기자 그리피스).” 6월11일, 아홉 겹 솜옷 갑옷을 입고 팔다리를 놀리며, 간단히 부러져나가는 총칼을 든 채 조선군은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남북전쟁에서 단련된 미군과 싸웠던 거란다. 끝없이 장렬하다만 그만큼 비참한 정경 아니었겠니.

부채에 이름 써서 순국을 한마음으로 다짐하고 미군도 감탄할 만큼 결사적으로 저항했던 장렬함은 기림받아 마땅하고 길이 기억해야 할 거야.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그 장렬한 죽음의 이유를 깨달아 다른 죽음을 면하게 하는 지혜가 아니었을까. 태산보다 무거운 생명들의 결사의 각오를 그저 총알받이로 몰아넣고 그 ‘장렬함’에 들떠 눈물 흘리며 “적들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는 죽음으로 이긴다”는 착각, 요즘 말로 하자면 ‘정신 승리’는 광성진에서 죽어간 어재연 이하 조선군들이 거부할 일이지 않을까. 몇 년 전 미국으로부터 임대 형태로 반환하여 한국 땅에 들어온 수(帥)자 기. 그 장군기 밑에서 싸우다가 죽고, 몸을 굴려 벼랑으로 떨어져 죽고, 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죽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후회는 절대로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장렬하게 죽기보다 비겁하게라도 이기고 싶었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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