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明太). 조선 후기 이후 오늘날까지, 이 땅의 사람들이 정말 많이도 먹어온 바닷물고기다. 부산 초량의 왜관에서 근무한 적 있는 일본인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는 그의 책 〈교린수지(交隣須知)〉에 명태를 언급하며 함경도에서만 난다고 썼다. 실학자 서유구(1764~1845)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생물은 명태, 말린 것은 북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물고기가 나지만 명태어와 청어가 가장 흔하다”라고 했다.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명태를 “매일 먹는 반찬거리”라고 했다. 20세기 초반 한국통감부가 주도해 나온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는 산업상 가치 있는 한국 수산물 60종 가운데 명태를 첫 번째로 서술했다.

명태는 아낌없이 주는 생선이다. 명태는 통째로 국, 찌개가 된다. 살을 뜨면 부침용이다. 명태를 말린 북어나 황태는 생물과 전혀 딴판의 식료가 된다. 북엇국이나 황태찜이 예다. 명태의 간, 정소(이리)가 다 맛난 식료이고 아가미, 창난은 젓갈이 된다. 알집에 소금을 더해 삭힌 것은 ‘명란’이다.

ⓒ시사IN 조남진명란 전문기업 덕화푸드의 공장 내부 모습. 이 회사는 규모·품질·연구개발에서 한국의 명란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오늘날 한국 명란 생산의 중심지는 부산이다. 그 가운데 ㈜덕화푸드는 규모·품질·연구개발에서 부산은 물론 한국의 명란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덕화푸드 장종수 대표이사는 안타까운 현황부터 담담히 설명했다. “아쉽지만 국내산 명태 알집은 쓰기 거의 불가능해요.”

앞서 명태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한국의 명태 어획량은 1980년대 말을 지나며 곤두박질쳤다. 그간 명태의 새끼인 노가리를 남획한 데다, 수온마저 급변한 까닭이다. 급기야 2008년 한국의 공식 명태 어획량은 ‘0’을 찍었다. 그나마 2016년 세계 최초로 ‘명태 완전양식 기술개발’에 성공해 어떻게든 한국 명태의 역사를 이어갈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다. “예부터 한국인은 강원도 고성 이북, 함경도 바다에서 난 명태를 먹어왔어요. 하지만 지금은 베링 해역에서 잡은 명태의 알집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가소비를 위해 만드는 극소수 명란을 빼면 다 원양산이죠. 국제적인 해운망과 바로 통하는 부산이 원료 수입, 제조와 수출 등에서 유리해요. 부산의 입지와 명란이 손잡은 지는 꽤 오랩니다.”

명란의 상품성에 눈뜬 일본인과 일본 회사

예컨대 히구치 이즈하는 일찌감치 명란의 상품성에 눈뜬 일본인이다. 1897년 조선으로 와 강원도 원산에서 명태 어업에 종사하던 그는 조선인의 명태 손질과 알집 가공에 주목했다. 당시 일본인은 명태를 그리 즐기지 않았다. 1907년 강원도 양양에서 히구치 상점을 열고 명란 상품화에 속도를 낸 그는 1908년 부산 부평동으로 상점을 옮기고는 부산역 주변 여관 매점, 관부연락선 (시모노세키-부산 간 배편) 대기실의 기념품점을 중심으로 명란을 팔기 시작했다. 히구치 상점의 명란은 일본, 타이완, 만주로 확대되었다. 조선인이 좋아하는 명란과 고춧가루 양념을 일본인이 소화해 국제적인 상품으로 가져간 예다.

장종수 대표의 역사 강의가 더 이어졌다. “해방되고 일본으로 간 일본인들 가운데 명란 맛을 못 잊은 이들이 있었어요.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명란 기업 후쿠야를 창립한 가와하라 도시오는 1913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공립중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는 부산 명란의 기억을 산업으로 연결했어요.”

 

ⓒ시사IN 조남진부산 동구 초량동 언덕 위에 위치한 덕화명란 스토어(아래). 덕화푸드는 조리·공학·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후쿠야 홈페이지 한국어판을 열면 회사를 소개하는 첫마디가 이렇다. “후쿠야의 멘타이코 기원은 물론 한국에 있습니다.” 가와하라 도시오는 잊을 수 없는 명란을 일본화해 누구도 먹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명란젓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일본식 명란 ‘멘타이코(明太子)’ 산업의 시작이다. “지금 일본의 명란 시장은 한국보다 10배는 큽니다. 명란을 스파게티, 주먹밥, 명란 바게트, 스낵 등으로 다양화했고 슈퍼마켓, 편의점 어디에나 최고 품질의 명란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더구나 부산 기업인으로서, 그래 한번 해보자 하는 투지가 생깁니다. 고인의 뜻도 업적도 잊을 수 없고요.”

장 대표의 아버지 고 장석준 명장(2018년 7월30일 타계)은 1993년 ㈜덕화푸드의 창업주로, 명란 하나만으로 ‘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할 만큼 기업의 기반을 닦은 기술자이자 기업인이다. 2011년 오로지 38년간 명란 만들기에 전념한 공을 인정받아, 수산물 제조 분야에서는 단 한 명뿐인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되기도 했다. “생전에 안타까워하셨죠. 명란을 아예 일본 음식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고. 한국 명란이 일본 명란을 이겼으면 하셨어요.” 장 대표가 취재진을 보고 웃는다. “누굴 이긴다는 마음? 그런 건 저는 없어요. 목표는 누가 먹어도 ‘아, 정말 맛있다’ 소리 나오는 명란을 만드는 거 하나! 산업화에 앞선 일본한테 배울 것이 있지만, 일본을 의식하는 마음은 없어요. ‘멘타이코의 기원은 물론 한국에 있습니다’라는 후쿠야의 그 자신감에 박수 한번 보내고, 내 할 일 해야죠.”

 

 

 

ⓒ시사IN 조남진장종수 대표(아래)의 아버지 고 장석준은 수산물 제조 분야에서 단 한 명뿐인 대한민국 명장이었다.

 

그는 지금 한국인에게 명란을 둘러싼 감각, 맛의 기억이 지워져 있다고 말했다. 무슨 말일까. “잘 삭은 해산물의 향이 있어야죠. 해산물 즐기는 사람이 좋아할 만큼 싱싱한 비린내가 나면서도, 씹으면 알알이 탁 터지는 쩡한 맛. 그런 명란 맛에 대한 기억이 없는 세대는 소금기 덜하고 덜 곰삭고 더 조미된 명란에 익숙하지요. ‘쩡한 맛’인데, 이런 게 실제로 유통에서는 잘 안 통해요. 뭔지 모르니까. 뚝배기에서 끓는 명란찌개, 달걀찜에 명란으로 간하기 이런 거 잘 상상을 못하죠. 젓갈의 짠맛 감각이 다르니까.”

과연 그렇다. 이를테면 〈난호어목지〉가 설명하는 명란은 알집이 샛노랄 때 채취해 소금만 질러 붉은빛이 나게 익힌 것이 전부다. 〈한국수산지〉가 기록한 명란 제법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명태 알집 270~300개에 소금 5홉(1홉은 약 180㎖)과 고춧가루를 더해 8~9되들이 항아리에서 삭힌다. 먹는 방식도 요즘과는 조금 다르다. 한글 고조리서(古調理書)에는 알집째 기름 발라 굽는다든지, 초를 쳐서 먹는 방식이 등장하기도 한다.

방신영(1890∼1977)의 〈조선요리제법〉(1934년판)은 명란을 파와 고추로 양념해 조리하는 찌개 및 찜을 싣고 있다. 또는 명란을 칼로 툭툭 끊어 움파(겨울에 움 속에서 자란, 빛이 누런 파) 채에 초를 쳐 함께 먹도록 했다. 장 대표는 이런 요리법의 실험에도 열심이다. ‘명란마요’도 하고, 명란 바른 김도 굽고, 연구실에서 명란 샐러드, 명란 파스타도 만들어봤다. 전통적인 제법까지 두루 참고해 한국 명란의 개성을 드러내는 맛의 기획으로 발전시키고 싶다. 실제로 명란 본연의 풍미를 소금으로 끌어올린 ‘백명란’을 내놨더니 한국 소비자의 입맛에 딱 맞았다. 일본 사람들은 ‘아, 한국 맛은 다르구나’ 하며 신기해했다.

모든 맛에는 맥락이 있다. 역사·문화· 사회적 맥락에다 음식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 서로 밀고 당기며 제3의 감각을 빚어낸다. 거기에 바람직한 맛을 그릴 줄 아는 상상력까지 더한 명란이라면 확실히 낫지 않을까. “염도 30% 명란에도 도전해봐야지요. 지금 소비자들은 보통 염도 4% 명란을 먹어요. 원형의 짠맛 또는 촉촉하지 않고 마른 질감을 놓고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앞으로 ‘젓갈은 원래 짠 것이다’라고 선언해서 산업을 자극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회사 내 ‘명란 연구직’만 다섯 명

실제로 ㈜덕화푸드의 실험 공간은 조리·공학·디자인이 함께 움직인다. 본사 밖에는 따로 쇼룸을 두고 명란의 재해석, 전통적인 맛과 대중적 접점의 탐색까지 기획 중이다. “명란이 일상의 음식으로 번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조리고요. 생산과 유통에서 빈틈이 없어야 하는 산업이니까 공학입니다. 이것이 일상의 미적 감수성과 손잡아야 하니 디자인이고요. 이 삼박자와 보통 사람의 식생활 감각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 싶어요.”

㈜덕화푸드의 성장만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한국의 명란 자체를 발전시키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지금 현장 인력 가운데 8년차 이하는 없다. 15년차 이상도 여럿이다. 회사 내에 ‘명란 연구직’만 다섯 명이다. 좋은 명란을 만드는 데에도 결국 ‘숙련’의 힘이 필요하다. 숙련을 통해 발효 기술의 완성을 이루는 게 장 대표의 목표다. “지금까지 명란은 염지와 조미에만 너무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젓갈 본연의 맛이란 건, 결국 비린내마저 조화시키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쩡한 맛’으로 가자면 발효 기술이 핵심이죠. 구체적 기술 내용은 비밀입니다. 분명한 건 가슴이 설렐 만한 맛이 태어나리라는 겁니다(웃음).”

 

기자명 부산/글 고영(음식문헌 연구자), 사진 조남진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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